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29. 17:08
1930년 국세조사 때 나타난 수씨는 강원도 금화에 2가구 함북은성에 1가구 등 3가구로 되어있다. 본관은 강능, 강남 2본이다.
어려서 일본에서 고아가된 송길만(부산시 중구 충무동)은 막연히 어머니를 찾아 귀환선을 타고 부산에 온 것은 1946년(18세때)에 일이다. 부모의 성을 몰라 일본에서 부르던 송본으로 통한 그는 1959년의 무효적자 자신신고때 충무시에 송씨로 신고하여 송씨의 시조가 되었다.
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29. 17:07
송씨는 문헌에 172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15본을 제외한 나머지 157본은 미고이다. 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모든 송씨의 도시조는 중국경조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호부 상서를 지낸 송주은인데 우리나라에 귀화한 경위는 분명하지않다. 주은의 7세손 송순공의 후손 자영이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 유익은 려산 송씨의 비조이고 중 천익은 은진 송씨의 비조이며 계 문익은 서산 송씨의 비조이다. 장구한 세월을 거치는 동안 분파 분종되었으나 모두 위 3파의 후손이라 한다. 그중 서산 송씨는 이석을 이조로 한다는 설이 문헌에 비칠 뿐 상고할 길이 없다. 金海宋氏(김해송씨) 시조 天逢봉(천봉) 시호:문정은 1330년(고려 충혜왕 즉위)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은 정언기거랑 감찰장영, 광양감무(군수) 대사헌, 첨밀직사사등의 요직을 역..
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29. 17:05
손씨는 문헌에 118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7본을 제외한 나머지 111본은 미고이다. 삼국 사기나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가 국가로 성립되기 전의 원시 부족사회인 사로(서라벌)은 6촌(알천, 양산촌, 돌산, 고허촌, 자산, 진지촌, 무산, 대수촌, 금산 가리촌, 명활산 고야촌)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6촌장이 각각 孫(손), 李(이), 崔(최), 鄭(정), 裵(배), 薛(설)로 사성받았다고 한다. 때는 신라 제 3대 유리왕 9년(32)이었다. 이것이 손씨의 시조이며 손씨로 사성받은 무산 대수촌장의 이름은 구례마이다. 또한 손씨는 모두 구례마의 후예라 하겠다. 그러나 일직 손씨만은 계보를 달리하고 있다. 慶州孫氏(경주손씨) 시조 順(순)은 득성조 구례마의 후손으로 효행으로써 853년 (흥덕왕 10) 월성(경주고호..
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29. 17:04
시조 邵雍(소옹)은 주나라 소공의 원손이라하며 「召」자가 전하여 邵씨가 되었다고 한다. 시조 옹의 자는 요부요, 호는 안락, 시호는 강절이며 관직은 穎(영)천단 연추관으로 신안백에 봉해졌다.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활략한 인물로는 고려 명종 때 경상도 안찰사를 지낸 광빈과 문종 숙종 때 문하시중 수태사를 지낸 태보 (시호 충겸)등이 있든데 그 소목계통을 밝힐 수가 없다. 후손들이 평산에 세거하면서 본관을 평산이라 하였다. 소씨는 평산 외에도 남양, 인주를 비롯하여 10본이 있다고 하나 그 시조나 분포상황은 알길 없다. 24(興흥) 25(漢한) 26(新신) 27(哲철) 28(啓계) 29(榮영) 30(舜순) 31(敏민) 32(有유)
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29. 17:03
소씨(蘇氏)는 진주를 본관으로 하는 단본이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진주를 비롯하여 진강·충주·능주·익산·조양 등 12개의 본관이 전해지고 있으나, 이는 모두 진주소씨의 분파 세거지를 이르는 것으로 본다. 『진주소씨세보(晉州蘇氏世譜)』에 의하면 오방신장(五方申將)의 하나인 적제(赤帝)의 61세손 태하공(太夏公) 풍(豊)이 기성(己姓)을 소(蘇)로 바꾸어 소씨가 비롯되었다. 태하공의 69세손인 진공(辰公) 소백손(蘇伯孫)이 경주로 옮겨 후진한주(後辰翰主)가 되고 그 뒤 27대 동안 살았다. 신라 6촌의 하나인 고허촌의 촌장 소벌(蘇伐)이 진공의 5세손이라 한다. 시조인 소경(蘇慶)은 진공의 29세손으로 상대등이 되어 경신년 봄 3월 2일에 진주의 도사곡(塗斯谷)으로 옮겼다. 소씨가 진주를 관향..
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29. 17:02
성씨는 원래 중국 성씨로 주나라 문왕의 제7자 성 숙부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 자손이 나나라 명「성」으로 명씨를 삼았는데 뒤에 초나라에 망하자 읍변을 떼 버리고 성씨라하였다 한다. 그후 당나라 때 학사 경이가 우리 나라로 건너 왔으며 뒤에 백제에 충이 있었고 신라에 저가 있어 두 사람이 다 절의와 벼슬이 당당하였다. 그러나 경이와 충은 창녕 성씨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상고할 수 없고 창녕성씨보에는 시조 인보의 아버지는 숙생이요 신라 대관 저의 후예라 하였다. 시조 인보는 창녕에 누대 세거한 호족이며 또 그곳에서 호장중윤을 지냈다. 삼국 말기에는 호걸이 각주군에 할거하고 있어 고려 태조는 관원을 파견하여 이를 다스리게 하였는데 당시 장민자를 호장이라하고 장병자는 장교라고 하였다. 그 후손들도 창녕에 정착거..
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29. 17:00
옛 문헌에 보이지 않던 성씨로 1930년 국세 조사 때 비로소 1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문헌에 나타난 최초의 섭씨는 1012년 고려 현종 때 송나라로부터 귀화하여 문종 때 승지를 지낸 섭성이 있는데 섭씨는 이들의 후손인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의 인물로는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전적을 지낸 천기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1930년 국세조사 당시 천안 아산등 충남에 20가구 와 전남 장성의 10가구등 모두 40여 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주요 본관은 공촌(수원) 처인, 회미, 인의, 해평, 니파산, 평해 등이다.
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29. 16:59
설씨는 문헌에 23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경주 순창 2본 이외의 본관에 대해서는 미고이다. 경주 설씨와 순창 설씨의 원조는 다같이 신라 6촌 가운데 명활산 고야촌 습비부장으로 전해진 호진(일명거백)이며 유리왕 때 다른 촌장들과 함께 설씨로 사성 받았다. 그리고 2본으로 나뉘어 있으나 본래 원호대사와 요석공주 사이에 태어난 빙우러당 설총의 후예이다. 慶州薛氏(경주설씨) 순창 설씨와 동원이다. 시조 支德(지덕)의 후손으로 습비부가 경주에 속하므로 본관을 경주로 하였다가 자승이 순화백에 봉해짐으로써 순창으로 이관하였으나 귀창을 파조로 하는 개성파는 종전대로 경주를 본관으로 하여 계대하고 있다. 41(基기) 42(鎭진) 43(源원) 44(杓표) 45(烈열) 46(在재) 47(鉉현) 48(澤택) 49(植식) 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