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29. 22:00
시조 득의는 1208년(고려 희종4)에 시어사를 지냈고 1241년(고종28) 문하시중을 거처 1271년(원종12)에 통어사를 지냈으며 만년에 강원도 홍천군 북방면 노일리에 용수사를 창건했다. 한편 학서루를 건립하여 이에 우거했다. 그의 후손이 그곳에 정착 세거 함으로써 본관을 홍천이라 하였다. 향사일은 매년 10월1일이다. 26(文문) 27(永영) 28(植식) 29(煥환) 30(重중) 31(錫석 鎬호) 32(淳순) 33(相상) 34(榮영) 35(在재) 36(鎭진) 37(演연) 38(模모) 39(燉돈) 40(均균) 41(鉉현) 42(源원) 43(秉병) 44(燮섭) 45(준)
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29. 21:59
요씨는 본시 중국의 성씨로 한제 때의 현도 태수 요광 당나라 소종때의 한림박사 요계등이 문헌상에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태조 원년에 물장경이 된 인휘가 있으나 오늘날의 요씨와 djEJs 관계인지는 상고할 수 없다. 관향은 휘주, 수원, 충주, 서원(청주별호)의 4본이 있으나 그 시조에 대해서는 알 수 없고 1930년 국세조사때 함북 성진의 6가구등 10여가구가 모두 이북에 산거하고 있었다. 성진의 6가구는 휘주요씨로 300여년전 병난을 피하여 중국으로부터 귀화한 후예라고 한다.
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29. 21:58
왕씨는 문헌에 15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여기서는 고려조의 왕족인 개성 왕씨와 성은 같으나 근본이 다른 제남왕씨로 크게 나누어 다루었으며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미고이다. 개성왕씨는 고려 500년 동안 번영을 누려왔으나 이태조가 조선을 창업하면서 멸문지화를 당해 숱한 왜화와 비극을 남기고 몰락해 갔다. 이러한 환란중에 도생지책으로 변성하여 타성으로 행세하던 왕씨들이 다시 환적하는 데는 어려움이 적지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 거의 환적하여 다시 왕씨 일문을 이루고 있다. 開城王氏(개성왕씨) 중국 황제 헌원씨의 17세손 조명은 유누와 함께 동래하여 지금의 평양 일토산하에 정착하였다. 그후 조명의 후손 수극은 기자가 왕이 되었을 때 사사가 되었고 왕씨로 사성 받았다 한다. 그후 수극의 12세손 贄(지), 贄의 ..
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29. 21:56
옹씨는 원래 중국의 성씨로 우리나라에는 없었던 성씨이다. 그런데 1930년 국세조사때 처음으로 경남 창원군 능남면 안민리에 8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후 조사결과 순창 웅씨가 그곳으로 이주해 있다가 1908년 민적에 기재할 대 잘못 기록되어 옹씨가 된 것이라 한다. 1960년 국세조사에는 인구 50명으로 되어 있으며 본관을 파평 단본이다.
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29. 21:55
옹씨는 순창과 부령의 두 본이 있는데 순창용씨의 시조는 명종때 판관을 지낸 몽진으로 알려져 있으나 부령 옹씨의 시조는 알 수 없다. 순창 옹씨의 시조 몽진은 태운이 아들로서 1553년(명종8)친경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고 음성현감을 거쳐 판관을 지냈다. 1930년 조사에 의하면 순창, 정읍등 전북에 50여가구 살고 있었고 기타 지방을 합하여 67가구의 분포를 보이고 있다.
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29. 21:53
당나라와 진나라를 통합한 숙우의 12세손 소후가 아우 수를 온에 봉하니 국호를 온이라 하고 도읍을 평원에 정하였다. 그후 온국의 공자장이 국명을 따라서 성으로 삼으니 이로부터 온씨의 연원이 이루어졌다. 그후 세원하고 고증이 없어 세계를 상고할 수 없으나 우리나라에서 온씨의 시원은 고구려의 평원왕 때 온달이 평강공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고 그로부터 온씨 혈통을 면면상계하여 왔다. 그러나 누차의 병화로 문헌이 실전되어 계대를 밝히지 못하고 신라 진덕왕 때의 군해 고려 충목왕때에 희양부사를 지낸 수로 이어져 왔으며 후손중에 선과 신 형제가 있었는데 선은 예의 판서를 지냈고 신은 우부사랑으로 공민왕15년에 이존오정추와 함께 신돈의 전횡을 탄핵하다가 봉성(김구)으로 폐출되어 그곳에 세거했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1세..
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29. 21:51
시조 玉眞瑞(옥진서)는 고구려의 요청으로 당나라에서 파견된 8재사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우리나라에 와서 국학의 교수가 되어 의춘(의령의 별호)군에 봉해지고 의령에 세거하면서 옥씨의 연원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후 실전되어 고려 때 창정을 지낸 은종을 1세조로 하고 본관을 의령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12(有유) 13(啓계) 14(應응) 15(成성) 16(敬경) 17(得득 炳병) 18(基기)
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29. 21:48
오씨는 문헌에 164본 또 210본이 나타나 있으나 16본을 제외한 148∼194본은 미고이다. 오씨 대동 종회에서 1962년에 편찬한에 의하면 모든 오씨의 도시조는 신라 22대 지증왕때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에 건너온 吳瞻(오첨)으로서 첨이 국명으로 다시 본국으로 건너 갔는데 그때 두 아들 중 둘째아들 웅은 그대로 함양에 남아 살았다고 한다. 그후 웅의 12대손 오광우가 다시 중국에 들어갔는데 그의 현손 오연총이 고려 문종 30년에 다시 우리나라에 건너와 정착세거함으로써 전국 오씨의 증시조가 된 셈이다. 그후 오연총의 6세손 수권이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큰 아들 현보는 해주군에 봉해짐으로써 해주 오씨의 시조가 되고 둘째아들 현좌는 동복군에 봉해짐으로써 동복오씨의 시조가 되었고 셋째아들 현필은 보성군에 ..
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29. 21:47
시조 樂全(악전)은 고려 인종때에 문화찬성사로 부계(의흥의 고호)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을 부계라 하고 있다. (문헌상으로 본관이 의흥으로 되어 있으나 족보는 의흥의 고호 부계로 됨) 16(周주) 17(碩석) 18(秀수) 19(新신) 20(文문) 21(時시) 22(東동) 23(大대) 24(龍용) 25(鍾종) 26(海해) 27(秉병)
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29. 21:45
영씨는 평해와 강령(옹진군 백령면의 고호)의 2본이 있다. 그러나 시조는 알수 없고 다만 관향이 있을 뿐이다. 1930년 국세조사 때 단 1가구가 서울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