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29. 15:08
우리나라 문헌은 물론 중국에도 없던 성씨로 보인다. 연안을 본관으로 하는 憚씨가 문헌에 보이고 연안단씨가 있는 것을 보아 혹시 동음에서 나온 표기의 잘못이 아닌가 하나 1930년 국세조사 당시 1가구가 경기도 부처군에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29. 15:07
본관 교동은 강화도에 딸린 작은 섬으로 연산군이 귀양갔던 곳이기도 하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옛날 그곳에 귀양갔던 신비의 후예가 아닌가 싶다. 1930년 국세조사 당시 수안 황주등 황해도 일대에 30여 가구등 40여 가구가 있었으며 1960년대 국세조사 당시에는 50여명이 각지에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뇌氏(뇌씨) 옛 문헌에 나타난 성씨이나 1960년 국세조사 당시 충북에 1가구 경기도에 1명 등 모두 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노씨는 문헌에 64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본서에는 강화, 광주, 함평, 밀양 등 4본을 제외한 나머지 본관에 대하여는 미상이다. 노씨는 본래 중국 주 나라 때 백리가 노에 봉해짐으로써 그 후손들이 노를 성씨로 삼게되었다 한다. 강화 노씨는 고려 명종때 이부상서를 지낸 노용신을 시조로 하고 광주노씨는 노필상을 시조로 하며 밀양노씨는 노중연을, 함평노씨는 노목을 시조로 하여 각각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江華魯氏(강화노씨) 시조 용신(시호 충양)의 선세계는 주나라 백리의 왼손으로 고려 고종때 강화현령으로 몽고군이 침입했을 때 강화 천도에 공을 세워 강화군에 봉해지고 토지를 하사 받았다. 그래서 후손들이 강화에 정착 세거 하면서 본관을 강화라 하였다. 53(仁인) 54(誠성) 55(柱주) 56(參삼) 57(碩석)..
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29. 15:06
고대 중국 황제의 후예라 하며 노땅에 봉해져 노씨가 되었다 한다. 언제부터 우리나라에 와서 살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고 1930년 국세조사때 개성 개풍군 일대의 22가구등 모두 40여 가구가 살고 있었다. 본관은 개성 태원, 북청 대원 등이 있다. 開城路氏(개성노씨) 시조 노은경(路誾儆)은 원나라 한림학사로서 고려 공민왕때 노국대장 공주를 배종하여 래조개성에 정착하여 세거하게 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개성이라 하였다. 15(聖성) 16(博박) 17(東동) 18(鎬호) 19(泳영)
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29. 15:05
노씨는 문헌에 137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11본만을 수록하고 나머지는 미고이다. 노씨성은 주나라 건국 공신 강태공의 후예가 제나라 노현에 봉해짐으로 연유하여 비롯되었고 우리나라 노씨의 도시조 노수(부: 익주자사 진순, 조부: 서주 자사 흥표)는 중국 범양 사람으로 755년(신라 효성왕 14) 안록산의 난을 피하여 아들 9형제를 데리고 동래 우리나라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의 아들 9형제가 광산(해), 교하(오), 풍천(지), 장연(구), 안동(만), 안강(곤), 연일(증), 평양(판), 곡산(원)으로 각각 봉작된 바에 따라 본관을 삼고 각기 분관하였다. 그런데 이 9형제 중 광산 노씨가 큰집으로 알려져 있으나 교하, 풍천노씨도 각기 자기가 큰집이라고 보첩에 나타나 있어 다소 의견이 있는 것 같다. 谷山盧氏..
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29. 15:04
옛문헌에 보이지 않던 성으로 1930년 국세조사때 충남 서천과 황해도 수안군 등지에 모두 4가구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본관은 나주 단본이다.
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29. 15:02
서울 마포구 용강동에 내원길의 고증에 따르면 내씨는 본원이 개성왕씨로서 고려 왕족이였는데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왕씨족은 가차없이 살해당하게 되었다. 그때 공민왕조의 재상이었던 왕씨(개성내씨 시조) 한사람도 생명을 보전키 위하여 망명하는 도중 임진강 나루터에서 건문포졸이 성이 뭐냐 묻는 말에 당황한 왕씨는 네? 하고 반문하자 포졸은 내씨로 성을 기재하여 비로소 乃(내)씨로 창성 되었다 하며 본관은 원래 왕씨 본관인 개성을 통용하여 마침내 개성 내씨가 되었다 한다. 한편 노일전쟁때 명성을 날렸던 일본 내목대장도 왕씨(즉 내씨)의 망명족이라고 하나 문헌상 고증은 미고이다. 개성내씨는 경기도 파주에 30호 서울에 20호 등 전국에 50호가 분포되어 있다한다.
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29. 15:01
시조의 이름은 알 수 없고 다만이라는 사실만 전하고 있다. 여러 문헌에 의하면 중국에서 귀화한 씨족임에 틀림없으며 일설에는 명나라의 낭초란 사람이 삼백여년전 인조때 황해도 웅진 부근에 배를 타고 건너왔다고 한다. 1930년 국세조사때 서울 경기도 예산 충주 등지에 40여호가 분포해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29. 15:00
시조 및 본관의 유래는 에 의하면 제갈씨의 시조는 에 등장하는 제갈량(공명)의 아버지가 되는 제갈규라 하는데 그의 20대손 제갈공순이 신라흥덕왕때 신라에 귀화한 것이 제갈씨의 시초이며 그 뒤 고려 고종 때 이르러 제갈홍 제갈영의 형제(세계 상으로 33세)가 복성을 각각 한자씩 나누워 쓰기로 하여 형 홍은 제씨로 아우 영은 갈씨로 분종하였다. 갈씨는 주요 본관 청주, 양주 외에 양근, 양성, 충주, 청풍, 청산, 청안, 청당, 육창, 해남, 황원, 비안곡, 화원, 가조, 죽장, 평양, 분원, 하원, 대원, 서경 등 22본이 전하나 시조는 미상이다. 역사상 드러난 인물은 에 고구려 장수왕 때의 장군으로 갈로라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오늘의 갈씨와 동일계 인지는 확실치 않다.
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29. 14:59
남궁씨는 원래 중국 주나라 문왕때 남궁자의 후예로서 고조선 시대에 남궁씨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세거하였으나 그후 계대는 전하지 않고 있다. 다만 991년(고려성종 10) 남궁원청(관직 평장사)이 대장군으로 여진족을 백두산 이북에까지 몰아낸 공으로 감물아(함열의 고호)백에 봉해짐으로써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함열로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원청 이후의 세계가 또한 실전되어 계대를 상고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후손인 득희를 1세조로 계승하고 있다. 시조의 묘소는 충남 보령군 청라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