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씨(趙氏)


 조씨는 문헌에 210본으로 나타나 있다. 조씨는 이조에 명성을 떨쳤으며 명문벌족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 중에서도 풍양, 한양, 양주, 평양, 임천, 백천, 함안, 옥천, 횡성조씨 등이 대본이다. 조씨는 동성동본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동계혈족이 아닌 이본일지라도 통혼을 하지 않는 것이 관례로 되어있다. 조씨의 210본 중 조맹(고려조 문하시중 평장사)을 시조로 하는 풍양조씨를 비롯하여 15성씨를 제외한 나머지 195성씨에 대하여는 미고이다.

金堤趙氏(김제조씨)

 시조 연벽의 선계는 중국에서 비롯되었으나 그 연원과 동래한 시기에 대하여는 상고할 수가 없다. 다만 황제의 8세손에 조숙이 있었다는 것 주나라 목왕 때 조부가 서언왕을 친 공으로 조성에 봉해져 조씨성이 비롯되었다는 것, 또 송나라 태조 조광윤이 있었다는 등의 사실이 단편적으로 전해올 뿐이다. 또 동래설에 의하여도 기자가 12인을 거느리고 왔을 때 그 가운데 조직이 있었다는 설, 그후 숙의 후손 세위가 중국에서 한림학사로 있다가 오계의 난을 피하여 동래하였다는 설이 있을 뿐 정확한 유래를 구명하기가 어렵다.
 시조 연벽은 1231년(고려 고종18) 몽고의 원수 살리타이(샬례탑)가 침략하였을 때 왕명으로 대장군이 되어 처인성에서 살례탑의 여적을 소탕한 공으로 상장군에 오르고 벽성(김제의 고호)군에 봉해졌고, 좌정승에 추증되었다. 후손들이 본관을 김제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묘소는 전복 김제군 김제읍 입석리에 있고 음3월3일에 제향.

<행 렬 자>

(대호군파)

16(奎규 啓계) 17(宅택 鉉현) 18(衍연 祿록) 19(東동 相상) 20(燮섭) 21(在재 周주) 22(鍾종 錫석) 23(泳영 淳순) 24(模모 秀수 植식) 25(性성 炯형 炳병) 26(喆철 선 墩돈) 27(범 鈗윤 銀은) 28(潤윤 운 求구 浩호) 29(桂계 柱주 柄병 榕용) 30(熺희 燉돈 燁엽 勳훈) 31(基기 袁원 奎규 坰경)

 

(문량공파)

16(震진 禧희) 17(福복 廷정) 18(重중) 19(得득) 20(鉉현) 21(澈철 漢한) 22(植식 根근) 23(燦찬 炳병) 24(坤곤 奎규) 25(東동 權권) 26(錫석 鎭진) 27(洙수 永영) 28(烈열 煥환) 29(埈준 在재) 30(鎬호 鏞용)

 

密陽趙氏(밀양조씨)

 

시조는 조흥사이고 인물로는 1768년(영조44) 문과에 급제한 석갑이 있다. 1930년 국세조사 통계에는 황해도 해주에 120호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白川趙氏(백천조씨)

 

시조 지린(시호: 공화)는 송나라 태조의 손자로 난을 피하여 동래하여 황해도 백천에 정착 세거하였고 고려 현종조에 좌복사 참지정사가 되었으며 그의 아들 양유는 고려 덕종과 정종 때 판위위사승을 지냈고 추의찬화익조공신, 문하시중으로 백천군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그 후손들이 본관을 백천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묘소는 황해도 연백군 운산면 도태리에 있고 향사일은 10월1일이다.

 

<행 렬 자>

25(台태) 26(金(변)) 27(源원) 28(根근) 29(增증) 30(鍾종) 31(浚준) 32() 33(煥환) 34(在재) 35(鎭진) 36(浩호) 37(植식 相상) 38(炳병) 39(培배) 40(錫석) 41(淵연) 42(模모)

 

楊州趙氏(양주조씨)

 

시조 잠(岑)의 선세계는 고려조의 양주호장통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나 연대가 요원할뿐더러 1453년 계유정란 때 후예들이 멸문지하를 입고 제고징이 소실되어 소목계통을 밝힐 수 없으므로 잠을 시조로 하고 본관을 양주로 하여 계대하고 있다.

 

<행 렬 자>

22(重중) 23(鎬호) 24(源원) 25(植식) 26(煥환) 27(載재) 28(鏞용) 29(永영)

 

玉川趙氏(옥천조씨)

 

조씨는 본래 중국 전욱의 후예로 백익의 후손이 요제 때 우와 더불어 치수에 공이 컸다하여 순제로부터 영씨를 하사받았고, 그후 주나라 목종이 서언을 치는 데 전욱의 후손 조부가 공을 세워 조성에 봉해짐으로써 그때부터 나라 이름으로 인하여 조씨라 했다고 한다. 조씨가 언제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살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않고 있으나 옥천조씨는 고려조에 광록대부검교대장군문하시중을 지낸 장을 1세로 삼고 그의 증손 원길(충헌공)이 공양왕 때 패광보국광록대부검교문하시중겸, 전공판서로 옥천 부원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그 후손들이 옥천(순창의 별호)을 본관으로 삼았다.

 

<행 렬 자>

20(孝효 廷정) 21(鉉현 善선) 22(淵연 澤택) 23(東동 休휴) 24(勳훈 容용) 25(翼익 奎규) 26(啓계 鎔용) 27(雲운 雨우) 28(權권 秀수) 29(愚우 熙희) 30(遠원 周주) 31(敏민 敬경) 32(洙수 衍연) 33(柱주 述술) 34(炅경 烱경) 35(重중 在재) 36(鈺옥 鋼강) 37(求구 漢한) 38(根근 杞기)

 

林川趙氏(임천조씨)

 

시조 조천혁은 송나라 태조의 손자 기왕(유길)의 제5자이다. 그는 진사시에 합격 서두공 봉관이 되었으나 979년(송태종 태평흥국4)에 위왕이 피화하므로 숙부 유고(백천조씨 시조)와 함께 화를 피해 동래하여 천혁으로 개명하고 호서지방(현 부여군 임천)에 정착세거하였다. 그후 고려 현종 때 강감찬과 함께 계단군을 대파하여 공을 세웠으므로 가림(임천의 고호)백에 봉해지고 문하시중평장사에 올랐다. 그래서 그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임천이라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묘소는 충남 부여군 장엄면 상황리에 있고 매년 10월10일에 향사한다.

 

<행 렬 자>

15(希희) 16(馨형) 17(期기 景경) 18(正정) 19(明명) 20(德덕) 21(學학) 22(在재 基기) 23(鎬호) 24(漢한) 25(植식) 26(容용) 27(圭규 英영) 28(鎭진) 29(澤택) 30(秀수) 31(燦찬) 32(埈준) 33(錫석) 34(潤윤) 35(桓환) 36(熙희) 37(培배) 38(鍾종)

 

稷山趙氏(직산조씨)

 

직산 조씨에는 시조를 달리하는 두 파가 있다. 그 하나는 조원우를 시조로 하는 직산조씨이다. 시조 원우는 고려조에 친어군 지휘사를 지냈으며 그의 손자 광보는 호부상서를 지냈고 후손들은 직산에 토착한 사족으로 본관을 직산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성을 시조로 하는 직산조씨인데 시조 조성은 고려말에 공훈이 있어 직백산에 봉해졌고 후손들은 직산에 세거하면서 사족으로서 일문을 이루고 있다. 그리하여 이 역시 본관을 직산으로 하여 계승하여 오고 있다.

 

眞寶趙氏(진보조씨)

 

시조 조용(시호: 문정)은 1374년(고려 공민왕23) 전시에 장원급제하고 벼슬은 정헌대부, 예의판서, 좌찬성겸수문전대제학을 역임했으며 1392년(조선 태조 원년) 유배되어 야주군(현 예천)에서 살았다. 조정에서는 그의 절이를 가상히 여겨 백천군을 진보군으로 이봉하였으므로 이로써 향관을 진보라 하였다. 그는 정포은의 문인으로서 문장과 학행이 탁월하였다. 그가 죽은 후 학문과 행의를 추모한 후학들이 예천에 향현사를 건립하여 그를 제향케했으며 조정에서는 예문관 대제학을 증직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백천에서 분적하여 본관을 진보라하고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행 렬 자>

28(植식) 29(熙희) 30(圭규) 31(鉉현) 32(求구) 33(相상) 34(炳병) 35(均균) 36(鎬호) 37(漢한) 38(秉병)

 

太原趙氏(태원조씨)

 

시조 만은 조선세조 때 장사랑으로 선계와 기타 그 일문에 대하여 알 수 없으나 족보에는 전란으로 함경도 북청에 가서 그곳에 정착세거하면서 태원조씨가 되었다고 한다. 묘소는 함남 북청군 신창읍 경안대리에 있다.

 

<행 렬 자>

13(珏각) 14(尙상) 15(宗종) 16(원) 17(喜희) 18(夏하)

 

平山趙氏(평산조씨)

 

시조 응선의 선세계와 연대에 대하여는 잘 알수 없으나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대사간으로 재임중 국왕에게 직간하다가 평산에 유배되었다 한다. 그후 세계가 실전되어 후손인 충백(참봉)을 중시조 1세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으며 유배지인 평산을 보관으로 하였다.

 

平壤趙氏(평양조씨)

 

시조 춘(椿)의 선세계는 은나라 사람으로 어느 시대에 동래했다는 사적은 없다. 그는 고려 때 금자광록대부로서 남송에 가서 금나라를 토평한 공으로 송나라 사장군이 되었다. 그의 5세손 인규(정숙)가 충숙왕 때 국구로 선충익재보조공신벽상삼중대광수태위태사상장군으로 평양부원군에 봉해져서 선대의 본관은 상원이라 했으나 충렬왕의 명에 따라 후손들은 본관을 평양이라 하였다.

 

<행 렬 자>

27(漢한) 28(相상) 29(恒항) 30(基기) 31(庚경) 32(淳순) 33(樂락) 34(魯노) 35(聖성) 36(鐸탁) 37(昶창) 38(稙직) 39(愚우) 40(珣순) 41(鍾종) 42(源원) 43(秉병) 44(憲헌) 45(垣원) 46(鎰일) 47(海해) 48(植식) 49(悳덕) 50(增증) 51(鎭진) 52(潭담) 53(禎정) 54(薰훈)

 

豊壤趙氏(풍양조씨)

 

시조 맹(孟)의 초명은 바위였다. 풍양현의 천마산(현 양주군 진건면 송릉리)밑에서 응거하여 오더니 만년에야 고려 왕건태조와 제우하여 고려 건국에 공을 세워 통합삼한벽상개국공신이 되고 호위가 상주국삼광문하시중평장사에 이르렀고 맹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천마산하에 그가 왕건 태조를 만났었다는 암굴이 있고 견성암이라는 절을 세워 수호하여 온다. 맹 이하의 세계는 실전되었는데 6세 실전한 전직공파는 천화사전직 지린을 1세로 하여 계대하고 몇대 실전인지 모르는 평장공파는 평장사공 신혁을 1세로 하여 계대하고 있다. 전직공파는 고려말옆의 인물을 기준하여 호군공(사충)파, 회양공(신)파, 금주공(임)파로 삼분하고 평장공파는 그의 증손 남원공(계팽)파로 칭하여 4파로 대분 되었으며 이 밖에도 수개파가 있다. 시조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진건면 송릉리산 54의 3에 있고 향사일은 음 9월 종정일이다.

 

<행 렬 자>

20(載재) 21(敦돈) 22(默묵) 23(柄병) 24(紀기) 25(康강) 26(南남 揆규) 27(衍연 演연) 28(誠성 行행) 29(熙희 振진) 30(鏞용 東동) 31(新신 淳순) 32(重중 卿경) 33(揆규)

 

漢陽趙氏(한양조씨)

 

사략에 의하면 주의 목왕이 서언왕을 정벌할 때 조부가 공을 세워 조성에 봉해졌으므로 나라 이름을 따서 조씨라 성하여 조씨의 연원을 이루었다 한다. 한양조씨의 시조 지수의 동래연대는 상고할 수 없고 그는 고려 때 조순대부첨의중서사를 지내고 용진에서 세거하였다. 그후 후손들이 조선 개국 때 한성으로 옮겨 가세가 크게 번영하였고 많은 명신 현유를 배출하였으므로 본관을 한양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행 렬 자>

(판도공파: 린재)

21(天천) 22(善선) 23(泰태) 24(東동) 25(容용) 26(遠원) 27(鍾종) 28(漢한) 29(秀수) 30(熙희) 31(圭규) 32(鉉현) 33(泳영) 34(植식) 35(炳병) 36(敎교)

 

(총관공파: 휘)

21(敎교 廷정 彦언 養양 觀관) 22(鍾종 載재 秉병 淵연) 23(元원 允윤 容용 榮영 震진) 24(炳병 昺병 基기 煥환) 25(行행 衡형 錫석 鎬호) 26(成성 誠성 泳영 海해) 27(熙희 紀기 東동) 28(慶경 庸용) 29(新신 章장) 30(廷정 聖성) 31(揆규 규) 32(學학 存존 厚후) 33(書서 肅숙 用용) 34(演연 寅인 璜황) 35(卿경 邵소 迎영) 36(震진 振진 養양)

 

咸安趙氏(함안조씨)

 

시조 정(鼎) 시호 충장은 후당인으로 신라 말기에 두 아우 부와 당을 데리고 절강인 장길과 함께 동래하였다고 한다. 그는 고려개국공신 신숭겸, 배현경, 복지겸, 김선평, 권행 등과 교우가 두터웠다고 하며 왕건을 도와 협주에서 기의 931년(태조14) 고창성에서 견원을 태파하고 동경주현 대부분을 항복받아 고려통일에 큰 공을 세워 개국벽상공신으로 대장군이 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고 함안에 세거하면서 본관을 함안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안동의 칠현사 동수의 출렬사 동수의 출렬사에 제향.

 

<행 렬 자>

26(性성) 27(奎규) 28(鏞용) 29(濟제) 30(來래) 31(顯현 熙희) 32(在재 埈준) 33(欽흠) 34(洙수) 35(東동) 36(煥환) 37(培배)

 

橫城趙氏(횡성조씨)

 

조씨는 본래 중국성씨로서 전욱의 묘예라고 한다. 주나라 목왕때에 비염의 아들 계승이 있었고 계승의 아들에 조부가 있었다. 목왕이 항시 조부를 호종케 하여 천하를 주유 할 때 곤륜산에 이르러 서왕모를 만나 요지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선경에 도착되어 돌아갈 줄을 몰랐다. 그때 자리를 같이 한 김모가 목왕에게 너의 나라가 서언왕의 침범을 당하고 있으니 속히 귀국하라 하니 목왕은 그때서야 정신이 퍼뜩들어 급히 귀국 조부로 하여금 초나라 군사를 빌어 서언왕을 치게하였다. 그 공으로 조부는 한단왕에 봉해지고 그 나라를 조나라라고 칭하였다. 그로하여 조성의 연원이 이루어 졌다고 한다. 그후 6대왕 조삭이 재위시에 권신 도연가에게 멸망당했는데 유복자 조무가 고아로 성장하여 도연가를 주살하고 한단에 조국을 재건한 후 전위11세 조혜왕에 이르러 진나라 안국군에게 망한바 되었다. 그 후예는 간신히 구명 동래하여 우리나라에 정착세거하게 되었고 그 후손중 956년(광종9) 시설문과에 장원하고 한림학사에 이른 욱이 있어 횡성조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그가 청덕이 높아 횡성군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본관을 횡성으로 하였다.

 

<행 렬 자>

<월천공파>

31(植식) 32(炳병) 33(圭규) 34(鎭진) 35(淳순) 36(東동) 37(煥환) 38(在재) 39(錫석) 40(洪홍) 41(根근) 42(炯형) 43(均균) 44(鏞용) 45(洙수)

 

<직장공, 참봉공, 별제공, 은은당공파>

31(基기) 32(鎭진) 33(源원) 34(植식) 35(炯형) 36(均균) 37(鉉현) 38(澈철) 39(東동) 40(熙희) 41(垠은) 42(鎰일) 43(泰태) 44(稷직) 45(炳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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