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30. 10:32
운씨는 본래 중국의 성씨이며 수양제 때 운정흥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청주, 장흥, 함흥의 3본이 있는데 모두가 시조를 알 수 없고 다만 관향이 있을 뿐이다. 1930년 국세조사 때는 경기도 강화군에 8가구가 살고 있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200여년 전에 육지에서 낙혼한 조상들이 하늘에 떠도는 뭉게 구름을 보고 운씨로 개성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혹은 중국으로부터 귀화한 후손들인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30. 10:31
조선씨족통보에 의하면 운씨는 전주 단본이며 시조는 알 수 없다고 했다. 1930년 국세조사에는 함남의 함주, 안변, 함흥 등지에 도합 11가구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우씨는 본래 중국의 성씨로서 주나라 무왕의 아들이 땅에 봉해짐으로써 「邑」를 떼고 于氏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우씨는 목천우씨는 목천우씨 단본으로 그 시조는 고려 인종 의종 연간에 상서좌복사를 지낸 나녕이다. 그리고 1930년 국세조사에 나타난 것을 보면 경북 성주의 19가구를 비롯하여 전국에 40여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30. 10:30
우씨의 선세계는 중국 하나라 우왕의 후예이다. 연대가 유원하고 문헌이 없으므로 계대를 상고할 수 없으나 원손 우현이 고려때 동래하여 단양에 세거하면서 1014년(현종5) 진사로문과에 급제하여 정조호장을 지냈고 문하시중평장사에 추증되었다. 그리고 그의 10세손 현보가 공양왕때 삼사사를 단양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단양이라 하여 계세하고 있다. 26(榮영) 27(鼎정) 28(命명) 29(鍾종) 30(濟제) 31(植식) 32(熙희) 33(喆철) 34(鎔용) 35(洙수) 36(柄병) 37(燮섭) 38(在재) 39(鎬호) 40(永영) 41(根근) 42(炅경) 43(均균) 44(鎭진) 45(淳순)
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29. 22:00
시조 득의는 1208년(고려 희종4)에 시어사를 지냈고 1241년(고종28) 문하시중을 거처 1271년(원종12)에 통어사를 지냈으며 만년에 강원도 홍천군 북방면 노일리에 용수사를 창건했다. 한편 학서루를 건립하여 이에 우거했다. 그의 후손이 그곳에 정착 세거 함으로써 본관을 홍천이라 하였다. 향사일은 매년 10월1일이다. 26(文문) 27(永영) 28(植식) 29(煥환) 30(重중) 31(錫석 鎬호) 32(淳순) 33(相상) 34(榮영) 35(在재) 36(鎭진) 37(演연) 38(模모) 39(燉돈) 40(均균) 41(鉉현) 42(源원) 43(秉병) 44(燮섭) 45(준)
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29. 21:59
요씨는 본시 중국의 성씨로 한제 때의 현도 태수 요광 당나라 소종때의 한림박사 요계등이 문헌상에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태조 원년에 물장경이 된 인휘가 있으나 오늘날의 요씨와 djEJs 관계인지는 상고할 수 없다. 관향은 휘주, 수원, 충주, 서원(청주별호)의 4본이 있으나 그 시조에 대해서는 알 수 없고 1930년 국세조사때 함북 성진의 6가구등 10여가구가 모두 이북에 산거하고 있었다. 성진의 6가구는 휘주요씨로 300여년전 병난을 피하여 중국으로부터 귀화한 후예라고 한다.
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29. 21:58
왕씨는 문헌에 15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여기서는 고려조의 왕족인 개성 왕씨와 성은 같으나 근본이 다른 제남왕씨로 크게 나누어 다루었으며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미고이다. 개성왕씨는 고려 500년 동안 번영을 누려왔으나 이태조가 조선을 창업하면서 멸문지화를 당해 숱한 왜화와 비극을 남기고 몰락해 갔다. 이러한 환란중에 도생지책으로 변성하여 타성으로 행세하던 왕씨들이 다시 환적하는 데는 어려움이 적지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 거의 환적하여 다시 왕씨 일문을 이루고 있다. 開城王氏(개성왕씨) 중국 황제 헌원씨의 17세손 조명은 유누와 함께 동래하여 지금의 평양 일토산하에 정착하였다. 그후 조명의 후손 수극은 기자가 왕이 되었을 때 사사가 되었고 왕씨로 사성 받았다 한다. 그후 수극의 12세손 贄(지), 贄의 ..
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29. 21:56
옹씨는 원래 중국의 성씨로 우리나라에는 없었던 성씨이다. 그런데 1930년 국세조사때 처음으로 경남 창원군 능남면 안민리에 8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후 조사결과 순창 웅씨가 그곳으로 이주해 있다가 1908년 민적에 기재할 대 잘못 기록되어 옹씨가 된 것이라 한다. 1960년 국세조사에는 인구 50명으로 되어 있으며 본관을 파평 단본이다.
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29. 21:55
옹씨는 순창과 부령의 두 본이 있는데 순창용씨의 시조는 명종때 판관을 지낸 몽진으로 알려져 있으나 부령 옹씨의 시조는 알 수 없다. 순창 옹씨의 시조 몽진은 태운이 아들로서 1553년(명종8)친경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고 음성현감을 거쳐 판관을 지냈다. 1930년 조사에 의하면 순창, 정읍등 전북에 50여가구 살고 있었고 기타 지방을 합하여 67가구의 분포를 보이고 있다.
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29. 21:53
당나라와 진나라를 통합한 숙우의 12세손 소후가 아우 수를 온에 봉하니 국호를 온이라 하고 도읍을 평원에 정하였다. 그후 온국의 공자장이 국명을 따라서 성으로 삼으니 이로부터 온씨의 연원이 이루어졌다. 그후 세원하고 고증이 없어 세계를 상고할 수 없으나 우리나라에서 온씨의 시원은 고구려의 평원왕 때 온달이 평강공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고 그로부터 온씨 혈통을 면면상계하여 왔다. 그러나 누차의 병화로 문헌이 실전되어 계대를 밝히지 못하고 신라 진덕왕 때의 군해 고려 충목왕때에 희양부사를 지낸 수로 이어져 왔으며 후손중에 선과 신 형제가 있었는데 선은 예의 판서를 지냈고 신은 우부사랑으로 공민왕15년에 이존오정추와 함께 신돈의 전횡을 탄핵하다가 봉성(김구)으로 폐출되어 그곳에 세거했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1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