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씨(李氏)


이씨는 <증보문헌비고>에서 451본 <조선씨족통보>에는 546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100본을 제외한 나머지 본관에 대해선 미고이다. 이씨는 신라 6부촌장의 한 사람으로서 32년(유리왕9)에 이씨로 사성받은 알평계 전주이씨의 시조 이한계, 중국에서 기화한 고성이씨계 당나라에서 신라로 기화한 연안이씨계 김수로 왕의 둘째아들로 모성을 따라 허씨로 했다가 현종으로부터 이씨로 사성받은 이허겸계, 원나라에서 귀화한 이지란계 등이 있고 그외의 재령, 아산, 가평 등 대다수의 이씨는 경주에서 분적되었다.

 

加平李氏(가평이씨)

 

시조 椿桂(춘계)(시호:충익)은 고려조에서 벼슬이 판도판서에 이르렀다. 그의 증손인 형손은 조선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고 병마절도사로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가평군에 봉해짐으로써 그의 후손들은 본관을 가평으로 하게 되었다.

 

康津李氏(강진이씨)

 

시조는 본래 신라 남해왕 때의 사람 완이라고 하나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충렬왕 때 사람인 진을 1세로 강진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그는 1308년 충선왕(즉위전)이 원나라에 있을 때 보좌한 공으로 공신이 되었고 1354년(공민왕3)에 평리가 되었으며 천추사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행 렬 자>

 

26(熙희) 27(敎교) 28(鎬호) 29(潤윤) 30(柱주) 31(炳병) 32(基기) 33(錫석) 34(求구) 35(東동) 36(烈열) 37(在재) 38(鍾종) 39(洛락)

 

江華李氏(강화이씨)

 

시조 대평은 고려 때 중랑장 태보를 역임한 삼한벽상공신이다. 후손들은 그가 토착세거한 하음(강화의 고호)을 본관으로 하고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행 렬 자>

 

32(炳병) 33(圭규) 34(錫석) 35(洙수) 36(相상) 37(燮섭) 38(在재) 39(鉉현) 40(容용) 41(植식)

 

開城李氏(개성이씨)

 

시조 차감의 선대는 청주이씨에서 분적되었다. 그는 고려 충숙왕 때에 록사령, 동정, 개성부윤을 역임하면서 일문이 개성에 정착 세거하였고 그의 손자 덕시(문정)는 고려조에서 통훈대부에 이르렀고, 이조의 개국원종공신이다. 이때부터 후손들은 본관을 개성이라 하였다.

 

<행 렬 자>

 

16(후) 17(鉉현) 18(洙수) 19(炳병) 20(魯노 爀혁) 21(敬경 基기) 22(鎬호 鎰일) 23(洪홍 永영) 24(植식 東동) 25(炯형 忠충) 26(圭규 坤곤) 27(鍾종 鎭진)

 

結城李氏(결성이씨)

 

시조 昌旭(창욱)본래 홍양(충남 홍성) 사람으로 1414년(태종14)에 호남지방에 적들이 봉기하자 그때 그는 홍양 초토사로서 호남토적의 명을받고 토적에 대공을 세우고 예산전투에서 전사했다. 조정에서 그 대공을 가상하여 호남제군진무대장군에 추증하고 결주(결성별호 현 충남 홍성)군에 봉했다. 그 후손들은 창욱을 시조1세로 삼았고, 본관은 당초 이성이라 하였는데 정조 때 이르러 결성을 개관하였다. 묘소는 충남 홍성군 은하면 근은산 남록에 있다.

 

<행 렬 자>

 

22(穆목 根근 植식) 23(燦찬 夏하 燁엽) 24(圭규 壎훈) 25(鎭진 錫석) 26(洙수 제)

 

京山李氏(경산이씨)

 

고려 정종 때 성주에 거주한 이씨성 5가구가 있었다. 성주, 벽진, 성산, 광평, 경산이씨가 모두 성산으로 창관할 때 시조 덕부는 원래 계림(경주고호) 사람으로 경산(성주 고호)으로 이거하여 고려때 락거부정을 역임하면서 경산으로 본관을 정하였다.

 

<행 렬 자>

 

21(壽수 東동) 22(秉병 基기) 23(埈준) 24(鐸탁 鍾종) 25(源원 永영) 26(根근 相상) 27(薰훈 烈열) 28(在재 載재) 29(鎭진 鎬호) 30(淑숙 泳영) 31(樞추 柱주) 32(熙희 烋휴) 33(達달 遠원) 34(鏞용 鎔용) 35(漢한 淳순) 36(柄병 楨정) 37(默묵 煦후) 38(志지 孝효)

 

慶州李氏(경주이씨)

 

시조 謁平(알평)은 진한 6촌장의 1인으로서 BC 57년 다른 5촌장과 함께 박혁거세를 신라초대 왕으로 추재하고 개국원훈으로 아손의 벼슬을 지내고 32년(유리왕9) 양산촌을 급양부로 고치고 이씨로 사성받아 이씨의 연원을 이루었다. 그 후 세계를 이어 오다가 36세손 거명(소판공)을 중조(1세조)로 하여 계대하고 있다. 본관은 시조의 발상지 양산촌의 경주로 바뀌었으므로 경주로 하였고 경주의 고호가 월성임으로 월성이씨라고도 한다.

 

<행 렬 자>

 

35(榮영) 36(圭규) 37(鍾종) 38(雨우) 39(相상) 40(熙희 炯형) 41(在재) 42(鎬호 鍵건) 43(濟제 濬준) 44(東동) 45(丙병 心심) 46(敎교 世세) 47(鎭진) 48(求구) 49(根근) 50(燮섭) 51(埈준) 52(善선) 53(泰태) 54(模모) 55(炫현) 56(均균) 57(鎔용) 58(淳순) 59(秉병) 60(杰걸)

 

高靈李氏(고령이씨)

 

시조 憲(헌)은 고려조에서 예부상서, 평장사를 역임했으며 유공하여 고령군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언은 상서좌복사를 역임하였다. 후손들은 본관을 고령이라 하고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행 렬 자>

 

17(培배) 18(寅인) 19(朝조) 20(正정) 21(直직)

 

古阜李氏(고부이씨)

 

시조 敬祖(경조)는 고려 문종때 사람으로 시호는 문헌이다. 구제학당인 문헌공도에서 수학하였고 문종 18년 동당시에 급제 한림학사를 거쳐 문하평장사에 이르렀다. 1071년(문종25) 김제와 함께 서장관으로 송나라에 다녀왔고 문종∼숙종에 이르기까지 5대를 섬긴 공으로 추충보정공신이 되어 려산군에 봉해지고 검교좌정승을 지냈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의 생장지인 고부를 본관으로 삼고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묘소는 부안군 줄포면에 있으며 향사일은 음3월15일이다.

 

<행 렬 자>

 

34(鍾종) 35(洙수) 36(楨정) 37(煥환) 38(在재) 39(鉉현) 40(泳영) 41(相상) 42(경) 43(周주) 44(錫석) 45(淳순) 46(權권) 47(熙희) 48(圭규) 49(銀은)

 

固城李氏(고성이씨)

 

고성이씨는 평해 장수황씨 평해구씨와 더불어 일찍이 중국에서 귀화한 씨족이다. 일설에 한나라 문제 때 중서사인인 이반의 후손 한 분이 무제가 우리나라를 공략할 때 충사령관이 되어 나왔다가 전쟁이 끝난 후에도 머물러 살게 되었다고 하는데 고성이씨는 반의 24세손인 로 하여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고려 덕종초 문과에 급제하고 밀직부사를 거쳐 1033년(덕종2)계단이 침입할 때 공을 세워 문종 때 호부상서에 이르렀으며 철령(현고성)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본관을 고성으로 하였다. 경남 고성에 그의 단이 있으며 음10월3일에 제향한다.

 

公州李氏(공주이씨)

 

시조 天一(천일)(시호: 문무)는 신라때 사람으로 학행이 높아 중국에 초선되어 18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사마대장군이 되어 그후 흉노정벌에 공을 세워 요동백이 되었다. 병으로 귀국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문화시중평장사에 이르고 공산(공주) 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공주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행 렬 자>

 

56(鎬호) 57(雲운) 58(仁인) 59(炳병) 60(圭규) 61(鍾종) 62(洙수) 63(樂락) 64(勳훈) 65(載재) 66(鎔용)

 

光山李氏(광산이씨)

 

광산이씨는 김씨로서 김알지의 후손 헌안왕의 7세손 김정(고려조 향공진사)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의 8세손 이순백(시호: 충장)이 고려 충숙왕때 사서좌복사로서 왕이 토번으로 갈 때 다른 신하는 모두 도피하였으나 그가 혼자 호종하였으므로 은청광록대부로 광산부원군에 봉해지고 이씨로 사성받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적이 실전되어 후손들은 그의 세계를 확실히 알지 못하였는데 최근에 문헌의 발견으로 경주김씨의 후계임이 밝혀져 정을 시조로 순백을 득성득관중조로 하여 세보를 시정하려고 서두르고 있다.

 

<행 렬 자>

 

16(東동) 17(煥환) 18(周주) 19(鎬호) 20(承승) 21(休휴) 22(炳병) 23(敎교) 24(鎭진) 25(源원) 26(相상) 27(爀혁) 28(在재) 29(鉉현) 30(海해) 31(杓표) 32(炫현) 33(培배) 34(鍾종) 35(濟제) 36(樂락) 37(煜욱) 38(載재) 39(錫석) 40(浩호) 41(至지) 42(世세)

 

廣州李氏(광주이씨)

 

시조 李自成(이자성)은 칠원에서 세거한 호족의 후예로 신라 내물왕 때 내사령을 지냈고, 그 후손이 신라 역조에서 벼슬하였는데 신라가 고려에 손국하자 고려에 불복하고 절의를 지켰으므로 고려 태조가 강계하여 준안의 호장으로 삼았다. 그후 준안이 이속으로서 세계를 이어오다가 석탄공(양중)파는 한희를 1세조로 하여 세계를 계때하고 후손인 당이 광주유수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5형제를 두었는데 5형제가 각각1세조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그 중 원령이 충목왕 때 문과에 급제 벼슬이 판봉상사에 이르렀는데 1368년(공민왕17) 신돈의 롱단을 논박하다가 화를 피해 영천에 사간 최원도의 집에서 피신 신돈이 처형된 후 복관되었고 그후 자손이 대대로 영화를 누리고 문호가 크게 번성했으므로 후손들이 원령을 중시조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본관은 조상의 세거지 준안이 고려 성종때 광주로 개칭되었으므로 광주이씨라 하였다.

 

<행 렬 자>

 

18(秉병 宜의 秀수 淵연 洙수) 19(來래 敎교 相상 寅인) 20(容용 錫석 榮영 煥환 熙희) 21(載재 淳순 壽수 在재 培배 基기) 22(鍾종 根근 錫석 鎭진 鉉현) 23(洙수 煥환 承승 澤택 永영 淳순) 24(柱주 時시 植식 柱주) 25(熙희 鎔용 炳병 炯형) 26(圭규 泳영) 27(鉉현 相상)

 

廣平(星山)李氏(성산광평이씨)

 

시조 茂材(무재)는 원래 성산인으로 고려말에 벼슬이 사재동정이었으며 그 증손 눙이 광평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광평으로 했으나 지금은 성산으로 쓰고 있다. 광평, 성산은 다같이 성주의 고호이다.

 

<행 렬 자>

 

20(榮영 守수 文문 春춘) 21(碩석 祿록 尙상) 22(圭규 益익 碩석) 23(在재 基기 會회 圭규) 24(鎬호 鉉현 鍾종) 25(源원 淑숙 浩호 洙수) 26(權권 根근 相상 柱주) 27(熙희 煥환 烈열 炳병) 28(中중 周주) 29(鎭진 欽흠) 30(洙수 河하) 31(和화 植식)

 

交河李氏(교하이씨)

 

시조 진형은 1702년(숙종28) 문과에 급제하고 고부군수를 지냈다. 분포는 1930년 국세조사 때 황해도 신천군 문무면 양암리에 39가구, 평남 강동군 원탄면 상리에 70가구, 강동군 원탄면 봉도리에 56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金溝李氏(김구이씨)

 

시조 주는 고려때 가선대부 흥문관 대제학으로 봉산(김구)군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본관을 김구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행 렬 자>

 

35(燁엽) 36(在재) 37(銓전 鎬호) 38(汝여) 39(柱주)

 

機張李氏(기장이씨)

 

시조 위의 고려때에 공이 있어 차성(기장별호)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기장에 세거하면서 본관을 기장이라고 하고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행 렬 자>

 

18(鐸탁) 19(永영) 20(秀수)

 

金浦李氏(김포이씨)

 

시조 관중은 임진왜란 때 성천으로 이거하였고, 조상들이 누대 세거하던 김포를 사모하여 본관을 김포로 하였다 그리고 그의 손자 창이 보국숭록대부로 김능(김포의 별호)부원군에 봉해지기도 하였다. 묘소는 성천군 성천면 각후동에 있다.

 

<행 렬 자>

 

17(致치) 18(述술) 19(琇수) 20(均균) 21(燦찬) 22(善선)

 

羅州李氏(나주이씨)

 

시조 철우(哲祐)는 이색(한산이씨)의 7세손이라고 하나 선계의 문헌이 실전되어 상고할 수 없다. 그의 조상이 누대를 나주에서 세거하였는데 그가 평남 개천군 마장으로 이사하여 세거하였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조상의 전향지 나주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시조의 묘소는 평남 개천군 북면 비호산 오좌에 있다.

 

<행 렬 자>

 

9(泓홍) 10(處처) 11(琢탁) 12(炳병) 13(熙희) 14(德덕) 15(鎭진)

 

南平李氏(남평이씨)

 

동말 이상의 계대는 문헌상 나타난바없어 그를 시조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그는 조선조에 보조공신행정헌대부병조판서를 지냈고 남평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남평을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묘소는 전남 나주군 나주읍에 있으며 향사일은 음 10월10일이다. 남평은 나주의 속현이다.

 

<행 렬 자>

 

14(友우) 15(烋휴) 16(基기) 17(銖수) 18(榮영) 19(述술) 20(炳병) 21(圭규) 22(鍾종) 23(澤택) 24(榮영) 25(烈열)

 

丹城李氏(단성이씨)

 

시조 峴(현)은 고려 때 평장사를 지냈다. 본래 고문단족으로 세보가 병화에 실전되어 선대에 대한 문헌이 전하지 않아 후손인 원발(태자첨사)을 1세로 하여 계대하여 7세손 영보(판서)가 만년에 문공서원의 원장으로 단성(경남 산청군 단성면)에 살면서부터 본관을 단성으로 하였다.

 

<행 렬 자>

 

(통진파)

29(在재) 30(錄록) 31(仁인) 32(權권) 33(昶창) 34(培배) 35(鍾종) 36(源원) 37(容용) 38(爀혁) 39(奎규)

 

(신계파)

29(垠은) 30(鍊련) 31(泳영) 32(桓환) 33(熏훈) 34(赫혁) 35(鎔용) 36(濬준) 37(桂계) 38(默묵) 39(瑞서)

 

(광주파)

29(起기) 30(碩석) 31(準준) 32(信신) 33(炫현) 34(埈준) 35(鎣형) 36(澤택) 37(彩채) 38(勳훈) 39(璡진) 

 

 

丹陽李氏(단양이씨)

 

단양 盃煥(배환)은 단산(단양의 고호) 사람으로 고려 태조의 삼한통합을 도와 삼중대광문하시중이 되고 삼한벽상공신이 되었다. 그리고 세계가 실전(8세실전)되었다가 10세손인 이방규(고려 때 출사)로부터 계대되었고 15세손인 무가 참찬문하부사로서 제1차 왕자의 난에 방원을 도와 정사공신 1등으로 단산 부원군에 봉해짐으로써 본관을 단양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행 렬 자>

 

22(言언) 23(文문) 24(之지) 25(一일) 26(弘홍) 27(汝여) 28(陽양) 29(鳳봉) 30(聖성) 31(道도) 32(學학) 33(相상) 34(大대) 35(基기) 36(錫석) 37(潤윤) 38(根근) 39(熙희) 40(均균)

 

潭陽李氏(담양이씨)

 

시조 덕명(德明)은 본래 신평이씨였으나 고려 인종때 담양군에 봉해져 그후 후손들이 분적하여 담양으로 본관을 삼게 되었다.

 

<행 렬 자>

 

26(錫석) 27(永영) 28(秉병) 29(容용) 30() 31(鎬호) 32(淳순) 33(稷직) 34(然연) 35(均균) 36(鍾종) 37(澤택) 38(相상) 39(煥환) 40(起기) 41(鉉현) 42(海해) 43(東동) 44(熙희) 45(基기)

 

大興李氏(대흥이씨)

 

전주 이씨에서 분적했다. 시조 연계(連桂)는 관직이 이부상서에 올랐는데 이태조가 함흥으로 가려는 것을 만류한 죄로 예천으로 유배되었다가 태종3년(1403)에 풀려나와 대흥군에 봉해졌다. 전주이씨로 복원하라는 하교도 있었으나 불응하고 본관을 대흥으로 했다.

 

<행 렬 자>

 

13(浩호) 14(錄록) 15(寬관) 16(鎭진) 17(永영) 18(相상) 19(炳병) 20(均균 學학) 21(致치 鍾종) 22(自자 炳병 基기) 23(達달 根근 鎬호) 24(容용 燦찬) 25(善선)

 

德山李氏(덕산이씨)

 

시조 存述(존술)은 고려 때 덕풍(덕산)호장을 지냈다. 아들 언후 손자 극보는 다같이 검교대장군을 지냈다. 그래서 덕산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행 렬 자>

 

22(貞정) 23(錫석) 24(水(변)) 25(相상) 26(煥환) 27(基기) 28(鎔용) 29(永영)

 

德水李氏(덕수이씨)

 

시조 敦守(돈수)는 고려 때 중랑장을 지냈으며 증손 윤온은 봉익대부 밀직사판도판서 선충경절공신벽상삼한삼중대광수첨의정승감춘추관사를 지냈고 덕수 부원군에 봉해져서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덕수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행 렬 자>

 

21(魯노 熙희) 22(奎규 信신) 23(敏민) 24(永영) 25(種종) 26(烈열 煥환) 27(載재) 28(鏞용) 29(浩호) 30(相상) 31(愚우) 32(均균)

 

德恩李氏(덕은이씨)

 

덕은이씨는 원조 알평의 원손인 거명의 14세손 전때부터 전위 이씨와 분보되었다. 전의 자는 국서이고 한성부우윤을 거쳐 덕은(은진의 고호)군에 봉해졌다. 이 때문에 후손들이 덕은을 본관으로 삼았다. 묘소는 충남 논산군 은진면 토량리에 있다.

 

<행 렬 자>

 

22(明명) 23(坤곤) 24(鎭진) 25(淏호) 26(秀수) 27(燮섭) 28(園원) 29(鍾종)

 

東城(泗川)李氏(동성사천이씨)

 

시조 李軾(이식)은 1308년(충렬왕34)에 국자진사에 합격하고 송악군수를 지냈다. 시조이후 12대에 이르기까지 사마시에 합격하여 명문사족으로 칭함을 받았으나 득관의 유래를 밝히지 못하고 가첩에 기록된대로 이식을 시조로 본관을 동성(사천의 고호)으로 하고 있다. 후손들이 사천군 협천군 일원에 집단으로 살고 있으며 진주시, 진양군, 하동군, 거창군 등지에 산재하고 있다.

 

<행 렬 자>

 

22(煥환 炫현) 23(中중 基기) 24(鍾종 鎬호) 25(永영 泳영) 26(震진 植식) 27(南남 浚준) 28(圭규 奎규) 29(兌태 鎔용) 30(淵연 洙수) 31(甲갑 榮영) 32(華화 烈열) 33(在재 載재)

 

碧珍李氏(벽진이씨)

 

시조 종언은 신라 헌안왕 때 벽진 태수로 있을 때 용맹을 떨쳤으며 고려 태조를 도와 삼중대광개국공신으로 벽진대장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영은 태조의 부마로 대제학이 되었다. 후손들이 본관을 벽진으로 하고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행 렬 자>

 

31(和화) 32(愚우) 33(基기) 34(善선) 35(源원) 36(種종) 37(夏하) 38(致치) 39(義의) 40(漢한) 41(秀수) 42(輝휘)

 

鳳山李氏(봉산이씨)

 

시조 隨(수)는 조선 태종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대제학 의정부참찬을 역임하고 모친상을 당하자 사직했다가 후에 이조 병조판서를 역임했다. 문장과 덕행이 높아 충녕대군(세종)의 사부가 되었고, 봉산토지를 하사받아 후손들이 그곳에 세거하면서 본관을 봉산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묘소는 황해도 봉산에 있으며 향사일은 6월15일이다.

 

<행 렬 자>

 

20(浩호) 21(榮영) 22(勳훈) 23(均균) 24(鉉현) 25(洪홍) 26(相상) 27(熙희) 28(喆철) 29(鎬호) 30(永영)

 

扶安李氏(부안이씨)

 

시조 之發(지발)의 선대는 부안지방에 토착한 사족이었으나 실전되어 미상이고 그는 1471년(성종2) 장사랑에 올라 평북 용천으로 이사하여 그곳에 정착세거했다. 그후 6세손 봉정이 숭록대부로 보안(부안의 별호)군에 봉해졌으므로 본관을 부안으로 소목계통이 확실한 지발을 시조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묘소는 평북 용천군 외하면 하호동에 있다.

 

<행 렬 자>

 

16(載재 鶴학) 17(時시 彬빈) 18(永영 秀수) 19(俊준) 20(東동 根근) 21(珪규 基기)

 

扶餘李氏(부여이씨)

 

시조 稟(품)(공부시랑)은 고려 정종의 왕비인 용목왕후의 아버지로 월성 부원군에 봉해졌으며 후손들이 부여에 세거하면서 본관을 부여로 하였다.

 

<행 렬 자>

 

27(大대) 28(希희) 29(玉옥) 30(秀수) 31(炳병) 32(培배) 33(根근)

 

富平李氏(부평이씨)

 

시조 희목(希穆)은 고려 태조를 도와 통합삼한삼중대광벽상공신에 훈록되었다. 증손인 정공이 시어사문하시랑을 지내고 문하시중에 이르러 부평백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부평을 본관으로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행 렬 자>

 

25(永영) 26(秉병) 27(演연) 28(卿경) 29(振진) 30(起기) 31(鉉현) 32(泰태) 33(植식) 34(容용) 35(圭규) 36(鍾종) 37(浩호) 38(東동) 39(魯노) 40(致치)

 

商山李氏(상산이씨)

 

시조 지환은 고려 때 광록대부를 지냈다. 그의 손자 민도(정헌)는 이조 좌명개국공신 이등으로 상산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상산으로 하였다.

 

<행 렬 자>

 

17(性성) 18(載재) 19(欽흠) 20(濟제) 21(相상)

 

西林李氏(서림이씨)

 

비조 益存(익존) 시호:문충의 18세손 세공(시호: 효사)이 고려의 공신으로 서림군에 봉해졌고 또 20세손 언충(시호:충경)이 고려의 원훈이 되어 서주군에 봉해짐으로써 연안이씨에서 분적 언충을 시조로 하고 서림을 본관으로 하여 계대를 계승하고 있다.

 

<행 렬 자>

 

22(榮영) 23(炳병) 24(喆철) 25(鍾종) 26(濟제) 27(東동) 28(熙희) 29(埈준) 30(鎭진) 31(海해) 32(植식) 33(容용)

 

星山李氏(성산이씨)

 

시조 能一(능일)은 본래 경산현(성주고호)사람으로 고려 태조를 도와 견훤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웠다. 태조가 그를 가상하여 사명을 하면서 처음의 이름 능자에 일자를 더해 능일로 하였다 한다. 또한 태조의 딸 대장공주와 결혼해서 부마가 되고 개국벽상공신삼중대광사공에 봉해졌다. 매년 한식일에 유허지인 성주읍 경산등 단소에서 향사한다. 성주에는 6가문의 이씨가 있는데 성주이씨의 중조는 신라재상 순유(시조)의 12세손 장경 경산이씨의 시조는 고려 때 락거부정인 덕부광평이씨의 시조는 고려말 사재사주부 무재, 가리이씨의 시조는 고려 밀직부사인 승휴이다. 성산이씨 시조는 능일, 벽진이씨 시조는 벽진장군 종언, 이상 6이씨는 이조, 정조, 이전 다같이 성주이씨로 쓰기로 하였다.

 

星州李氏(성주이씨)

 

시조 李純由(이순유)는 아우 돈유와 함께 신라에 벼슬하여 재상에 올랐으나 신라가 망하게 되자 절개를 지켜 고려조에서 벼슬하지 않고 이름을 극신이라고 고쳐 경산(성주의 고호)부에 옮겨 살며 대대로 호족을 이루니 고려조에서 누대를 걸쳐 그 후손들을 호장으로 삼았다. 고려 고종때 시조의 12세손 장경이 호장을 지내면서 덕망이 높았고 아들 5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공이 많았으므로 그에게 삼중대광좌시중도첨의정승지전리사상호군에 추증 성산부원군에 추봉하였고 장경의 손자 승경이 원나라에 가서 벼슬할 때 공이 많아 원제가 선칙하여 그의 조부 장경을 용서군공에추봉하였으므로 장경을 중흥시조로 하여 세계를 계승한다. 중흥시조가 용서군공에 추봉되었으므로 용서이씨라고도 하며 그의 아들 5형제가 문과에 급제하고 가세가 크게 번성해진 당시(충렬왕이후) 성주목의 지명에 따라 성주이씨라 한다. 중흥시조 이장경의 묘소는 경북 성주군 대가면 옥화동 능곡에 있으며 매년 음 10월1일 향사한다. 성주의 안산서원, 연봉서원, 고흥의 성산사, 산청의 안곡영당, 금능의 보본사, 옥천의 평산사, 금능의 상친사에 제향.

 

<행 렬 자>

 

(백파)

20(秀수) 21(煥환) 22(圭규) 23(鉉현) 24(永영) 25(木(변)) 26(火(변)) 27(土(변)) 28(金(변)) 29(水(변)) 30(木(변)) 31(火(변)) 32(土(변)) 33(金(변)) 34(水(변)) 35(木(변))

 

(중계파)

20(容용) 21(敎교) 22(鍾종) 23(淳순 洙수) 24(相상 秉병) 25(燮섭 熙희) 26(圭규 在재) 27(錫석 鐵철) 28(澤택 永영) 29(植식 根근) 30(炳병 鉉현) 31(基기 培배) 32(鈺옥 鎔용) 33(洪홍 洛락) 34(炳병 桂계) 35(炯형 烈열)

 

遂安李氏(수안이씨)

 

시조 堅雄(견웅)은 본래 경산 사람으로 고려 태조를 도와 견훤을 토평하는데 공을 세워 벽상삼중대광태사평장사개국공신이 되었다. 12세까지 경산(성주)에 정착했으며 13세손 연송이 충렬, 충선, 충숙 3대에 벼슬해 삼중대광태사평장사로 수안군에 봉해졌다. 특히 충숙왕 때 흥년이 들자 원나라에 가서 45만석의 양곡을 얻어와 백성을 구호하는데 공을 세워 왕으로부터 그의 고향인 장색현을 수안군으로 승격시켜 식읍으로 하사 받았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곳에 세거하면서 본관을 수안이라 하고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행 렬 자>

 

39(在재  坤곤) 40(鍾종 鎭진 鏡경) 41(海해 濟제 淵연) 42(相상 東동 根근) 43(煥환 燮섭 燁엽) 44(奎규 均균 壽수)

 

水原李氏(수원이씨)

 

시조 子松(자송) 시호: 문정은 1358년(공민왕7) 양광 전라도 찰리사가 되고 1362년 전법 판서로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홍건적의 평정을 알렸다. 이때 원나라가 덕흥군(고려 충선왕의 제3자 그때 원나라에 가 있었음)을 고려왕으로 책봉 군사를 거느리고 귀국케 할 때 그 호종을 받았으나 이를 거부하고 숨어 있다가 1364년에 귀국, 그공으로 밀직부사가 되고 단성보조공신의 호를 받았다. 다음해 평양윤으로 부임. 1372년 동북면존무사를 거쳐 1377년(우왕3) 삼사좌사겸, 순위부상만호로 사은사가 되어 북원에 다녀왔다. 1382년 수문하시중에 올라 공산부원군에 봉해졌다가 죽은 뒤 수성(수원의 별호) 부원군으로 개봉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수원에 세거하면서 본관을 수원으로 하고 있다. 묘소는 충남 청양군 청양면 교월리 남산을 좌이며 향사일은 10월1일이다.

 

<행 렬 자>

 

19(錫석) 20(浩호) 21(秉병) 22(熙희) 23(基기) 24(鉉현) 25(承승) 26(榮영)

 

順天李氏(순천이씨)

 

시조 師古(사고)는 고려조에서 문하시중으로 승평(순천의 고호)백에 봉해졌으며 그의 후손들이 순천에 세거하면서부터 순천을 본관으로 삼았다.

 

<행 렬 자>

 

15(忠충) 16(鎭진) 17(浩호) 18(和화) 19(熙희) 20(載재)

 

新平李氏(신평이씨)

 

시조는 백제 때 신평호장을 지낸 인수인데 도중에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조에서 문하시중을 역임한 덕명(시호:문간)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신평은 본래 백제 사평현이였는데 그후 안평, 흥평, 해풍, 해흥등으로 현호가 변경되었고, 1018년(고려 현종9)에 직금의 홍성군에 편입되었다가 선조초에 당진군에 편입되었다. 덕명의 묘소는 충남 당진군 송악면 오곡리에 있고 음10월1일에 향사한다.

 

<행 렬 자>

 

26(錫석) 27(永영) 28(秉병) 29(容용) 30() 31(鎬호) 32(淳순) 33(稷직) 34(然연) 35(均균) 36(鍾종) 37(澤택) 38(相상) 39(煥환) 40(起기) 41(鉉현) 42(海해) 43(東동) 44(熙희) 45(基기) 46(鎭진) 47(永영) 48(秀수) 49(夏하)

 

牙山李氏(아산이씨)

 

시조 周佐(주좌)의 선세계는 신라 대아손 알평에서 유래하며 또한 그는 경주이씨의 시조 소판공 거명의 5세손이기도 하다. 그는 고려조에 형보상서판어사로 사공에 추증되었고, 그의 아들 는 고려고종때 밀성부사로 공이 있어 군기감이 되었고, 1268년(원종9) 판위위사사, 벽상공신 삼중대광으로 아주(아산의 고호)백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본관을 아산으로 하게 되었으나 그후 세계가 미상하여 그의 후손 옹(문하시중)을 기1세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安山李氏(안산이씨)

 

시조 希勣(희적) 철산방어사는 1231년(고려 고종18)몽고, 살리타이가 고려를 침범할 때 철산판관으로 끝까지 싸우다가 순국한 용장으로 후손들이 안산에 세거하면서부터 본관을 안산이라 하였다.

 

<행 렬 자>

 

32(允윤) 33(枝지) 34(義의) 35(亨형)

 

安城李氏(안성이씨)

 

시조 仲宣(중선)은 중국 용서이씨 청륜계의 맹선, 중선, 계선 3형제 가운데 중씨로서 송조에서 벼슬을 지내다가 경력연간에 송나라 사신 안수, 진목을 따라 고려에 들어온 뒤 문종의 청탁으로 세자 세손등의 사부가 되고 그후 경군호장이 되어 장민의 공으로 문하시랑에 올랐다. 이자의 난때 재상 왕국모를 따라 평정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으로 삼중대광태사에 올랐다. 4조에 걸쳐 벼슬을 지내다가 헌종말에 이르러 치사한 뒤 백하군에 봉해졌다. 백하는 안성의 별호이므로 후손들은 안성을 본관으로 삼게되었다.

 

<행 렬 자>

 

22(昌창) 23(顯현) 24(坤곤) 25(鎬호) 26(漢한) 27(相상) 28(燦찬)

 

安岳李氏(안악이씨)

 

원조 極圭(극규)는 고려 때의 공신으로 양산군에 봉해지고 안악읍을 식읍으로 하사 받았다. 후손 괴의 16세손 견이 검교문하대승상장군으로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개성사수의 명을 받고 개성부윤 신부와 함께 분전하다가 전사 안악군에 봉해져 그를 1세조로 계대하고 본관을 안악으로 하였다. 견의 묘소는 황해도 안악군 아악읍 양산이며 향사일은 10월 13일이다.

 

<행 렬 자>

 

21(鉉현) 22(洙수) 23(相상) 24(熙희) 25(基기) 26(錫석) 27(浩호) 28(柄병) 29(炅경) 30(培배) 31(鏞용) 32(海해) 33(東동) 34(勳훈) 35(在재) 36(均균) 37(準준) 38(林임) 39(炯형) 40(圭규)

 

梁山李氏(양산이씨)

 

시조 萬英(만영)은 고려말 문과에 급제하고 조선 태조 때 공신으로 이조 판서를 지내고 인천백에 봉해졌다. 그리고 그의 아들 선생이 공민왕때 순찰사로 전국을 순방하다 양산군 하북면 삼수리에 정착 세거했고 손자 등석은 태종때 (1407년) 추충좌익공신순록대부 예조판서, 중추부사로 양산부원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본관은 양산으로 하였다. 묘소는 경남 창령군 장마면 장가리에 있다.

 

<행 렬 자>

 

10(紀기) 11(春춘) 12(聃담) 13(汝여) 14(洛락) 15(之지) 16(健건)

 

陽城李氏(양성이씨)

 

시조 秀匡(수광)은 고려 문종 때 사신으로 송나라에 가서 공을 세워 금오위대장군, 삼중대광보국, 양성군에 봉해짐으로써 본관을 양성으로 해서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행 렬 자>

 

23(禮예) 24(智지) 25(洙수) 26(來래) 27(煥환) 28(奎규) 29(鎬호) 30(濟제) 31(柄병) 32(燦찬) 33(基기) 34(鍾종) 35(永영) 36(相상) 37(燮섭) 38(載재) 39(鏞용) 40(漢한) 41(稷직) 42(性성) 43(均균) 44(鍵건) 45(澈철) 46(株) 47(憲헌) 48(珉민) 49(鎭진) 50(潤윤)

 

楊州李氏(양주이씨)

 

시조 석숭(碩崇)의 선세계는 알 수 없으나 그는 양주에 토착한 사족이다. 후손들은 양주에 세거하면서 본관을 양주라 하고 세계를 계대하고 있다.

 

<행 렬 자>

 

12(運운) 13(赫혁) 14(夏하) 15(律율) 16(植식)

 

驪州李氏(여주이씨)

 

여주이씨는 시조를 달리하는 세 파가 있다. 그 하나는 고려조에 인용교위을 지낸 인덕을 시조로 하고 또 하나는 규보(시호: 문순)의 아버지로서 고려조에 호부시랑을 지낸 윤수를 시조로 하며 나머지 하나는 언적(시호: 문원)의 선조로서 진사 세정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들은 다같이 여주에 토착세거하는 사족으로서 본관을 여주로 하고 있다.

 

<행 렬 자>

 

(인덕파)

25(鍾종) 26(九구) 27(弼필) 28(衡형) 29(茂무) 30(熙희) 31(鏞용) 32(宰재) 33(廷정) 34(揆규) 35(相상) 36(烈열) 37(左좌) 38(錫석) 39(永영)

 

(윤수파)

21(基기) 22(鉉현) 23(永영) 24(植식) 25(熙희) 26(萬만) 27(元원) 28(丙병) 29(寧녕) 30(盛성) 31(起기) 32(庸용) 33(章장) 34(聖성) 35(揆규)

 

(세정파)

21(在재) 22(能능 元원) 23(久구 時시) 24(錫석) 25(源원) 26(東동 植식) 27(熙희 煥환) 28(址지 圭규)

 

延安李氏(연안이씨)

 

시조 茂(무)는 원래 중국 당나라 출신으로 당나라 고종때 중랑장으로 있다가 소정방의 부장이 되어 신라에 들어와 백제를 평정한 공으로 연안백에 봉해짐으로써 그의 후손들은 본관을 연안으로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후 계대가 실전되어 세계를 상고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후손 가운데 10개파로 분파하여 습흥(태자첨사공파) 핵(예부상서공파) 현여(판소부감공파) 분양(이부시랑공파) 방(전법판서공파) 원주(대장군공파) 득량(밀직부사공파) 백연(판도정랑공파) 계연(영광군사공파) 지(통례문사공파)를 중시조 1세로 하여 각각 계세하고 있는데 이중 정구(호 월사)를 배출한 통례문사공파, 광정을 배출한 태자첨사공파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행 렬 자>

 

(태자첨사공(습홍)파)

25(寧녕) 26(義의) 27(熙희) 28(庸용) 29(澤택) 30(聖성) 31(揆규) 32(敎교) 33(肅숙) 34(演연) 35(卿경) 36(振진) 37(원) 38(南남) 39(東동) 40(載재)

 

(대장군공(원주)파)

25(자 根근) 26(炯형 炳병) 27(圭규 均균) 28(鎬호 鍾종) 29(洙수 泳영) 30(模모 植식) 31(炅경 烈열)

 

(판소부감공(현여)파)

29(愚우) 30(翼익) 31(宰재) 32(承승) 33(錫석) 34(淳순) 35(元원) 36(夏하) 37(中중) 38(商상) 39(翊익)

 

(판소부감공파·중 월사공(정구)파)

9(愚우) 10(翼익) 11(宰재) 12(承승) 13(榮영) 14(勳훈) 15(圭규) 16(重중) 17(濟제) 18(根근)

 

(통례문사공후(세칙:구령)파)

15(徵징 命명) 16(恒항 觀관) 17(相상 遂수) 18(敎교 林림) 19(用용 嬉희) 20(榮영 均균) 21(鉉현) 22(永영)

 

寧川李氏(영천이씨)

 

시조 凌幹(능간)의 호는 송헌이다. 남원에서 나서 1320년(고려충숙왕7) 반시별감으로 원나라에서 상왕을 토번으로 유배시킬 때 상왕을 호종하였고 상왕이 죽자 자궁을 모시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1326년(충숙왕13) 지사사우상시로 고려를 없애고 성을 두겠다는 조치가 있자 이를 중지시켜 「면좌당」이라는 사림의 액호를 받았다. 1332년(충회왕2) 문화시중으로 있으면서 조 의 난때 1등공신이 되어 영천 부원군에 봉해짐으로써 본관을 영천으로 하였다. 묘소는 임실군 지사면 계동이며 향사일은 한식일이다.

 

<행 렬 자>

 

21(奎규) 22(鍾종) 23(源원) 24(東동) 25(炫현) 26(在재) 27(錫석) 28(泳영) 29(根근)

 

永川李氏(영천이씨)

 

영천이씨의 본원은 32년(신라유리왕9) 신라건국이전부터 있었던 씨족집단인 6촌을 6부로 개칭하면서 사성한 급양부(알천 양산촌)의 촌장 알평에서 비롯되었으나 그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초에 평장사를 지낸 문한을 시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으며 그의 후손(세계미상) 대영이 영양(영천의 별호)군에 봉해졌으며 보관을 영천으로 하는 계통과 고려때 영동정을 지낸 전을 1세조로 하는 계통이 있다.

 

<행 렬 자>

 

(문한파)

19(廷정) 20(후) 21(年년) 22(泰태) 23(相상) 24(炳병) 25(載재)

 

(전파)

21(發발) 22(魯노) 23(在재) 24(章장) 25(泰태) 26(植식) 27(炳병) 28(圭규)

 

寧海李氏(영해이씨)

 

시조 연동延東(연동)은 신라 사공 한의 후손(전주이씨)으로서 고려조에 문하시랑을 지냈으며 공이 있어 영해군에 봉해졌다. 그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하고 전주(완산)이씨에서 분적 본관을 영해로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행 렬 자>

 

30(時시) 31(鐸탁) 32(濟제) 33(植식) 34(燦찬) 35(均균) 36(鎬호) 37(源원) 38(柱주) 39(煥환) 40(達달) 41(鉉현)

 

禮安李氏(예안이씨)

 

시조 곤(시호: 문장)은 고려태조 때 삼한개국익찬공신에 오른 도(시호: 성절)의 7세손 천의 제2자이다. 그는 원종 때 등제하여 첨의정승에 이르러 예안백에 봉해졌고, 그의 손자 익이 보문각제학으로 예안군에 봉해지면서부터 전의 이씨에서 분적하여 본관은 예안으로 했다. 단소는 충남 연기군 전의면 유천리에 있으며 매년 3월과 10월에 향사한다.

 

<행 렬 자>

 

21(烈열) 22(用용) 23(善선 會회) 24(準준) 25(植식) 26(憲헌) 27(敎교) 28(鎬호) 29(泳영) 30(鍾종 東동) 31(默묵) 32(奎규) 33(宰재) 34(雲운) 35(來래) 36(性성) 37(遠원) 38(錫석) 39(雨우) 40(榮영) 41(容용) 42(基기)

 

溫陽李氏(온양이씨)

 

시조 흥서(興瑞)는 1591년(선조24)에 옥천군수가 되어 재임중 임진왜란을 당하여 항전하다 순국하였으며 며칠 뒤 부인도 병사했다. 그래서 생후 6개월된 그의 아들 해는 외가에서 자라게 되어 선친 이전의 세계를 모르고 죽었다. 손자 만입의 대에 이르러 난중향기에서 조부의 행적은 알게 되었으나 역시 선대는 알 수가 없어 이흥서를 1세조로 하고 본관을 온양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묘소는 충남 옥처군 옥천읍 대천리에 있다.

 

<행 렬 자>

 

9(相상) 10(燁엽) 11(培배) 12(善선) 13(洪홍) 14(模모) 15(炳병) 16(圭규) 17(錫석) 18(漢한) 19(根근) 20(燮섭) 21(在재) 22(義의 九구) 23(泳영) 24(杓표 柱주) 25(煥환) 26(均균)

 

龍宮李氏(용궁이씨)

 

시조 정식(禎植)의 선세계는 여주 이씨였음이 전할 뿐 사적에 대하여는 병화로 인해 전하는 바가 없다. 다만 고려 충령왕때 이조판서를 지낸 삼의 3형제가 있었는데 중형에게는 계대할 손이 없어 삼의 아들로 양자를 삼았다. 그후 중형이 50에 상처를 하고 재취하여 아들 3형제를 출산하자 그를 양자에서 폐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관에 알려져 백형은 회령, 중형은 곽산, 삼은 강계로 유배되어 후손들은 유배되기 전의 세거지 용궁을 본관으로 하였다.

 

<행 렬 자>

 

20(水(변)) 21(木(변)) 22(火(변)) 23(土(변)) 24(金(변)) 25(木(변)) 26(木(변)) 27(火(변)) 28(土(변)) 29(金(변)) 30(水(변)) 31(木(변)) 32(火(변)) 33(土(변)) 34(金(변)) 35(水(변))

 

龍仁李氏(용인이씨)

 

시조 길권(吉券)은 고려조의 부마로 벼슬이 삼한벽상공신 태사삼중대광으로 구성(현용인)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용인을 본관으로 해서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묘소는 용인군 기흥면 영덕리에 있으며 향사일은 10월 5일이다.

 

<행 렬 자>

 

(용인·순천파)

26(岳악) 27(世세) 28(宜의) 29(普보) 30(祐우) 31(在재) 32(鉉현) 33(源원) 34(相상 東동 澤택 弼필) 35(榮영 光광 원 在재) 36(圭규 基기 模모 世세) 37(鎭진 鍾종 喜희 燮섭) 38(漢한 洙수 奎규) 39(根근 植식 錦금) 40(悳덕 炳병) 41(壽수 鏡경) 42(善선 鍊연) 43(益익) 44(秀수) 45(性성) 46(重중) 47(錫석) 48(演연)

 

(함흥파)

38(植식 根근 洙수 杓표) 39(炯형 燦찬 炳병 煥환) 40(壎훈 培배 均균 塾숙) 41(錫석 鎭진 鉉현 欽흠) 42(海해 淳순 澈철 淵연)

 

羽溪李氏(우계이씨)

 

시조 양식(陽植)은 본시 알평의 후손으로 고려조에 중서사인좌복사를 지냈고 아들 순우는 의종 때  문과에 장원 한림학사를 지냈으며 경주에서 우계(강릉의 속현)로 이거하였다. 양식의 5세손 구에 이르러 경주 이씨에서 분적 보관을 우계로 하였다.

 

<행 렬 자>

 

29(炳병) 30(基기) 31(鎭진) 32(洙수) 33(東동) 34(熙희) 35(周주) 36(鍾종) 37(泰태) 38(相상) 39(應응) 40(圭규)

 

牛峰李氏(우봉이씨)

 

원조 두창(頭昌)은 우장군으로 지략이 출중하여 옥저로 하여 양마 200필을 공납케 한 공으로 신라 공신이 되었고 그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명종조에 김자광록대부벽상삼한공신에 오른 후손 공정을 1세로 하고 있다. 공정은 문하시중으로 음성부원군에 봉해졌고 수지의 음성, 우봉 등을 식읍으로 하사받아 그곳에 세거 본관을 우봉으로 하였다.

 

<행 렬 자>

 

23(用용) 24(九구) 25(丙병) 26(寧녕) 27(茂무) 28(範범) 29(康강) 30(宰재)

 

蔚山李氏(울산이씨)

 

시조 이철(李哲)은 고려 고종때 삼중대광문하시중판전이사사를 지내고 공훈이 있어 학성군(현 울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울산으로 계대하고 있다. 충남 천안시, 천원군 북면, 직산면 등지에 많이 살고 있다.

 

<행 렬 자>

 

23(煥환) 24(在재) 25(鎔용) 26(濟제) 27(集집 柱주) 28(炳병 烋휴) 29(基기 圭규) 30(鍾종 鎭진)

 

原州李氏(1)(원주이씨(1))

 

신조 신우(申佑)는 경주 이씨 거명위 12세손이다. 그는 고려조에 병부상서를 지내고 공이 있어 원주백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경주 이씨에서 분적 원주를 본관으로 해서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행 렬 자>

 

32(孝효) 33(鉉현) 34(浩호) 35(桓환) 36(炳병) 37(均균) 38(鎭진) 39(求구) 40(根근) 41(燮섭) 42(圭규) 43(鎬호)

 

原州李氏(2)(원주이씨(2))

 

시조 춘계(春桂)는 고려의종때 병부상서를 지냈으며 그의 선세계는 중국 절서성에서 살다가 병난을 피하여 진한으로 와서 원주에 정착세거했다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원주를 본관으로해서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행 렬 자>

 

25(彬빈) 26(容용) 27(在재) 28(善선) 29(淵연) 30(秉병) 31(煥환 燮섭) 32(奎규 基기) 33(鉉현 錫석) 34(漢한 源원) 35(楨정 植식) 36(熙희 熏훈)

 

陰竹李氏(음죽이씨)

 

시조 방서(方瑞)는 고려 때에 밀직사사를 지냈으며 그의 손자인 헌조는 평장사를 지낸 이천지방의 사족으로 그의 후손들은 음죽(이천의 고호)을 본관으로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행 렬 자>

 

20(復복) 21(遇우) 22(致치) 23(植식) 24(燮섭)

 

益山李氏(익산이씨)

 

시조 문진(文眞)은 고구려 애양왕때 대학박사 문부전서 오경박사로 공신후가 되고 백제 공주를 취하여 백제로부터 익주(익산의 고호)를 식읍으로 하사받았다. 그후 실전되어 세계를 밝힐 수 없어 후손인 고려 개국공신에 태위를 지낸 의를 1세조로 하고 본관을 익산으로 하여 계대하고 있다.

 

<행 렬 자>

 

31(基기) 32(鍾종) 33(洙수) 34(楨정) 35(煥환) 36(圭규) 37(鎬호) 38(潤윤) 39(植식) 40(熙희) 41(培배) 42(鎔용) 43(淳순) 44(東동) 45(燮섭) 46(在재) 47(鍊련)

 

麟蹄李氏(인제이씨)

 

시조 원철은 고려 때 중추원부사를 역임하였다. 인물로는 이조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예를 지낸 견의와 사용을 지낸 정필이 있다.

 

仁川李氏(인천이씨)

 

시조 허겸(許謙)의 선대는 가야국 김수조왕의 둘째 아들로 모후의 성을 따라 허씨가 되었다. 허겸은 신라의 아손으로 사신이 되어 입당하였는데 마침 안록산의 난으로 현종이 촉으로 들어갈 때 위험을 무릎쓰고 호종한 공으로 현종으로부터 제성인 이씨를 사성받았다 한다. 환국하여 왕이 공로를 치하하고 벼슬이 높이며 소성(현 인천)백에 봉했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인천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묘소는 인천시 연수동 문학산에 있으며 향사일은 매년 청명일이다.

 

<행 렬 자>

 

31(祥상 禧희) 32(柄병 根근) 33(熙희 煜욱) 34(在재 埈준) 35(夏하 殷은) 36(鉉현 鍊련) 37(洙수 泰태) 38(東동 秉병) 39(然연 烋휴) 40(重중 裁재) 41(鎭진 銖수) 42(浩호 沂기) 43(植식 柱주) 44(燦찬 炳병) 45(均균 圭규) 46(光광 正정) 47(鎬호 鈺옥) 48(淵연 潤윤) 49(林임 棟동) 50(炫현 炅경) 51(宰재 宗종) 52(鍾종 鎔용) 53(洛락 源원) 54(秀수 株주) 55(默묵 勳훈) 56(致치 址지) 57(鐸탁 鎰일) 58(洪홍 淳순) 59(植식 杓표) 60(熺희 炯형)

 

長水李氏(장수이씨)

 

시조 임간(林幹)은 고려 충선왕 때 정승으로 장천 부원군에 봉해졌고 그의 증손인 을진은 공민왕 때 정승을 지내고 순충적덕보조공신으로 장천 부원군에 증직되어 후손들이 장수를 본관으로 하였다. 묘소는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에 있다. 장천은 장수의 별호.

 

<행 렬 자>

 

17(文문) 18(臣신) 19(在재) 20(錫석) 21(永영) 22(煥환 燦찬) 23(培배 基기) 24(錫석) 25(洪홍) 26(早조) 27(斗두)

 

長興李氏(장흥이씨)

 

시조 원성은 1486년(성종17) 문과에 급제하고 정언에 이르렀다. 1930년 국세조사 때 그 후손들이 남제주군 서귀포읍 하효리에 19가구가 강원도 춘성군 동면 상걸리에 20가구가 살고 있었다.

 

載寧李氏(재령이씨)

 

시조 이우칭은 고려 때 보조공신문 하시중으로 재령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경주이씨에서 분적하여 그를 시조로 삼고 본관을 재령으로 하였다.

 

<행 렬 자>

 

34(海해 浩호) 35(秉병 東동) 36(燮섭 煥환) 37(均균 在재) 38(鏞용 錫석) 39(洪홍 永영) 40(相상 柱주) 41(熙희 烈열) 42(圭규 坤곤) 43(鍾종 錫석) 44(淸청 洛락)

 

全義李氏(전의이씨)

 

시조 도(棹)의 초명은 치며 시호는 성절이다. 본래 공주에 세거했는데 고려 태조가 견훤을 정벌하고자 남하하여 공주에 도착했을 때 금강이 범람하자 태조를 도와 무사히 도강케 했다. 그래서 태조로부터 도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통합삼한개국익찬이등공신에 책록되었으며 벼슬이 삼중대광태사에 이르고 전산(전의)후에 봉해졌다. 그후 전의 이성산 아래로 이거했기 때문에 후손들이 전의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묘소는 연기군 전의면 유천리에 있으며 향사일은 음 3월3일과 10월2일이다.

 

<행 렬 자>

 

30(鍾종) 31(浩호) 32(相상) 33(燮섭) 34(基기) 35(鎭진) 36(源원) 37(秀수) 38(容용) 39(均균) 40(錫석) 41(永영) 42(東동) 43(煥환) 44(重중) 45(鉉현) 46(泰태) 47(柱주)

 

旌善李氏(정선이씨)

 

시조 陽 (양혼)은 송나라 안남국 남평왕건덕의 제3자로 자는 원명이다. 휘종(1114-1125년)때 금나라의 난을 피하여 우리나라 경주에 정착하였기 때문에 본관을 경주로 하였다. 그후 1186년(고려 명종 26) 그의 6세손 희민과 아들 성순일문이 최충헌에게 화를 입자 9세손인 우원이 정선으로 낙향하여 세거하면서부터 본관을 정선이라 하였다.

 

<행 렬 자>

 

31(濟제) 32(根근) 33(燦찬) 34(坤곤) 35(鉉현) 36(洙수) 37(裁재) 38(榮영) 39(世세) 40(鎬호) 41(泳영) 42(植식) 43(焌준) 44(圭규)

 

貞州李氏(정주이씨)

 

시조 세화(世華)는 1217년(고종4) 문과에 급제하여 대영서승을 거쳐 신호위록사, 도명마사, 우사간지제고, 남원부사, 동주목사 등을 역임했다. 1232년 광주 안무사로서 몽고의 침입을 격퇴했으며 뒤에 예부시랑보문각직제학에 오르고 사재경을 지냈다. 정주는 풍덕의 별호이다.

 

眞寶(眞城)李氏(진보(진성)이씨)

 

시조 석(碩)은 고려말에 진보현이를 지내다가 생원이 되었으며 진보읍내에 살면서 항시 사실에 있을 때 관가에서 각성이 들리면 뜰 아래 내려와 부복하였다가 각성이 끝난 후에 일어나는 등 처향의 도를 이와같이 엄숙하게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현재가 미안하게 여겨 각성이 들리지 않는곳에 집을 지어주며 이주토록 하였으므로 그 터를 이씨 시조가 살던 터라고 전해 내려왔다. 그래서 후손들이 조상의 세거지 진보(진성)를 본관으로 하여 계세하고 있다.

 

<행 렬 자>

 

14(守수) 15(龜구) 16(淳순) 17() 18(晩만) 19(中중) 20(鎬호) 21(源원 洛락) 22(東동 植식) 23(熙희) 24(奎규 圭규) 25(錫석)

 

鎭安李氏(진안이씨)

 

시조 특용(特龍)은 진안 사람으로 학문과 덕행이 출중하여 진사에 급제한 후 여러 차례 시정을 바로 잡기 위한 상소를 하다가 안화(정주)로 유배되었다. 그의 후손들이 안화에 정착세거하면서 그에 대한 사적을 알고자 하였으나 누차의 병화로 소실되어 알 길이 없어 그가 세거하던 진안을 본관으로 하였다.

 

<행 렬 자>

 

25(哲철) 16(一일) 17(幹간) 18(錫석) 19(萬만) 20(學학) 21(文문) 22(郁욱)

 

振威李氏(진위이씨)

 

시조 자영(自英)은 경주이씨 시조 거명의 후예라고 하나 혈연계보를 상고할 수 없다. 그는 고려 때 예의판서를 지내면서 공을 세워 진위군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진위로 하였다.

 

<행 렬 자>

 

12(宗종) 13(一일) 14(景경)

 

晋州李氏(진주이씨)

 

경주 이씨에서 분적했다. 시조 군자는 경주 이씨의 중조인 거명(소판공)의 17세손인 이수의 아들이다. 그는 조선 태조 때 이조판서로 왕에게 직간하다가 성천으로 유배되었다. 그래서 그때 대제학을 사임하고 고향(진주)에 내려가 있는 형 영자를 생각하면서 본관을 진주로 하였다.

 

<행 렬 자>

 

20(鉉현) 21(浩호) 22(柱주) 23(勳훈 薰훈) 24(坤곤) 25(鍾종)

 

昌寧李氏(창녕이씨)

 

시조 정현(正賢)의 시호는 문간이다. 고려 원종 5년에 출생하여 충선왕 때 등제 예의판서를 거쳐 창산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은 창녕을 보관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행 렬 자>

 

24(南남 炯형) 25(致치 孝효) 26(鉉현 商상) 27(洛락 泰태) 28(東동 秀수) 29(燮섭 燾도) 30(遠원 厚후) 31(錫석 鎭진) 32(澤택 久구) 33(柱주 樹수) 34(炳병 炫현) 35(圭규 在재)

 

靑松李氏(청송이씨)

 

시조 덕부(德富)는 원래 성주에 세거하였으며 벼슬이 부정에 이르렀다. 그의 5세손인 우가 청송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을 청송으로 하였다.

 

<행 렬 자>

 

21(壽수) 22(基기) 23(致치 在재) 24(堯요 후) 25(達달 遠원) 26(孝효 老노) 27(增증 志지) 28(敎교 城성) 29(柱주 載재) 30(封봉 重중)

 

淸安李氏(청안이씨)

 

시조 학년(鶴年)은 고려 광종 때에 예부상서를 지내고 청안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청안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여 왔다. 그러다가 그의 14세손에 한번, 항상 두 형제가 있었는데 형 한번의 아들 광경은 호남파의 중시조가 되고 아우 향상의 아들 양길은 양남파의 중시조가 되어 분파 각각 기일세하여 계대하고 있다.

 

<행 렬 자>

 

(호남파)

17(鉉현 鍾종) 18(洛락 海해) 19(相상 根근) 20(炯형 熙희) 21(圭규 坤곤)

 

(영남파)

16(樹수 錫석 相상) 17(永영 東동 淵연) 18(和화 彬빈 楨정) 19(容용 淳순 炳병) 20(赫혁 夏하) 21(鎭진 圭규) 22(洛락 泰태 海해) 23(榮영 東동 植식) 24(煥환 烈열 燮섭)

 

淸州李氏(청주이씨)

 

시조 능희(能希)는 고려 개국공신으로 벽상 삼한삼중대광태사에 이르렀다. 10세손 계감은 량성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정은 서원(청주고호)백에 봉해졌고 13세손 애가 정사좌명공신으로 상당(청주고호)부원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을 청주로 하고 있다. 그리고 계감의 동생 계성은 보은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보은을 본관으로 하는 보은 이씨파가 있으나 여기서는 합하였다.

 

<행 렬 자>

 

27(熏훈) 28(周주) 29(鍾종) 30(洙수) 31(相상) 32(炫현) 33(奎규) 34(錫석) 35(治치) 36(柱주) 37(炳병) 38(基기) 39(鏞용) 40(泓홍) 41(東동) 42(炤소) 43(在재) 44(鎭진) 45(淳순) 46(松송) 47(熙희) 48(坤곤) 49(銘명) 50(泳영) 51(소) 52(焌준) 53(基기) 54(鎬호)

 

靑海李氏(청해이씨)

 

황송통보에 의하면 시조 지란(시호: 양열)은 중국 남송의 충신이며 당대의 명장 악비(시호: 무목)의 제5자 연의 6세손이다. 악비가 진희로 모해로 무참히 처형되자 연이 진희의 화를 피하여 황해 촌(함남삼수) 여진부락에 들어간 후 금나라에 출사하여 대관에 오르고 삼산맹의 첩목아가 되었다. 그후 원나라에서 정서대장군을 지낸 아원(아라불화)의 아들 두란이 천호를 승습하고 고론 두란첩목아라는 추장의 칭호를 받았다. 여진인의 풍습에 따라 모성을 따서 동두란이라고 하다가 1371년(공민왕20)고려에 벼슬하면서 이두란이라고 개성했고, 조선개국 후 이지란으로 개명했다. 이태조를 도와 개국공신에 오르고 청해군에 봉해졌으며 좌찬성을 지냈다. 후손들은 악비 장군의 원향 중국 청해성에 연유하여 본관을 청해로 하였다.

 

<행 렬 자>

 

16(承승) 17(연) 18(性성) 19(在재 喜희) 20(鎬호 鏞용) 21(求구 濟제 永영) 22(遇우 材재) 23(氣기 容용) 24(昺병 均균) 25(寧녕 銓전) 26(茂무 沅원) 27(選선 柱주) 28(庚경 煥환) 29() 30(廷정 鉉현) 31(揆규 汶문)

 

忠州李氏(충주이씨)

 

시조 墳(분)은 고려조에서 벼슬이 부평장사에 이르렀고 충주백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본관을 충주로 하였다.

 

<행 렬 자>

 

18(善선) 19(世세) 20(春춘) 21(仁인) 22(大대) 23(學학) 24(健건) 25(水수) 26(昌창) 27(燦찬) 28(基기)

 

泰安李氏(태안이씨)

 

시조 기(奇) 시호: 공소는 당나라서주출신인 승남의 후손으로서 그는 고려 광종 때 본국의 난을 피하여 우리나라 태안에 정착세거했으며 7세손 천은 태안을 식읍으로 하사받고 태안부원군에 봉해져 후손들은 본관을 태안으로 하였다. 묘소는 태안 남성산에 있다.

 

<행 렬 자>

 

34(相상) 35(熙희) 36(重중) 37(善선) 38(泳영) 39(極극) 40(光광) 41(圭규) 42(鎬호) 43(河하) 44(柱주) 45(杰걸) 46(壽수)

 

太原李氏(태원이씨)

 

시조 귀지는 고려 충렬왕 때에 송나라 사람들이 전화로 피난할 때 우리나라에 와서 사재판서 한성부윤을 지냈다. 그리고 그의 손자 방무는 랑징으로 이태조를 도와 개국원종공신으로 사정에 이르고 록권을 받았다. 그후 북청으로 이사하여 세거하면서 중국의 원향인 태원을 본관으로 삼았다.

 

<행 렬 자>

 

17(性성) 18(昇승) 19(南남) 20(珉민) 21(鏞용)

 

通津李氏(통진이씨)

 

시조 인(仁)은 수위부위 참판을 지냈고 성화연간(1460∼1490)에 함경도 경원으로 이거 전주소지 통진(김포의 속현)을 본관으로 하였다.

 

<행 렬 자>

 

17(東동) 18(雲운) 19(汝여) 20(京경) 21(植식) 22(宗종) 23(燮섭) 24(斗두 會회)

 

平山李氏(평산이씨)

 

시조 자용(子庸)의 선대는 당나라 설인귀가 보낸 8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나라 평산(동양)에 들어와 일반 백성들에게 예법을 가르쳤다고 전한다. 그후 실전되어 후손 부명을 시조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였으나 하계가 실전 되었기 때문에 다시 부명의 원손으로서 고려 때 밀직부사를 지낸 자용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으며 시조가 처음 평산에 들어가 세거했기 때문에 본관을 평산으로 하였다.

 

<행 렬 자>

 

22(寅인) 23(鏞용) 24(澈철) 25(權권) 26(熙희) 27(壎훈) 28(鉉현) 29(萬만) 30(九구) 31(會회) 32(祥상) 33(成성) 34(紀기) 35(泳영) 36(根근) 37(炳병) 38(志지) 39(錫석) 40(漢한) 41(康강) 42(宰재)

 

平昌李氏(평창이씨)

 

평창 이씨는 경주 이씨에서 분적된 계통으로 신라건국초에 양산촌장 알평의 40세손 윤장(시호 문성)이 고려태조때 개국공신으로 광록대부 대사마대장군에 오르고 백오(평창의 고호) 부원군에 보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윤장을 시조로 본관을 평창으로 하고 기세승습한다.

 

<행 렬 자>

 

32(鍾종 鉉현) 33(浩호) 34(模모 根근) 35(炳병 熙희) 36(均균 基기) 37(鎔용 鎭진) 38(洙수 演연) 39(和화 柱주) 40(爀혁 烈열) 41(載재 時시) 42(錫석 善선) 43(淳순 濟제) 44(相상 柱주) 45(夏하 炯형) 46(圭규 培배) 47(鎬호 鏞용) 48(泰태 河하) 49(東동 柄병) 50(勳훈 煥환) 51(在재 埼기)

 

河濱李氏(하빈이씨)

 

시조 거는 고려 명종조에 랑장에서 상서에 올랐으며 유공하여 하빈군에 봉해짐으로써 그의 후손들이 하빈을 본관으로 하였다. 시조 거의 자는 거옥이요 시호는 문정이며 묘소는 경북 달성군 하빈면에 있다. 향사일은 음10월10일이다.

 

<행 렬 자>

 

23(時시 燮섭) 24(義의 基기) 25(賢현 錫석) 26(道도 泰태) 27(在재 根근) 28(鎬호 燦찬) 29(源원) 30(柱주) 31(烈열) 32(埰채) 33(欽흠) 34(永영) 35(相상) 36(煥환) 37(圭규) 38(錫석)

 

河陰李氏(하음이씨)

 

하음이씨는 내시 정용랑장을 지낸 이영을 시조로 하고 후손은 충북 영동 양강에 25가구가 살고 있다.

 

鶴城李氏(학성이씨)

 

시조 이예(李藝) 시호 충숙은 1396년(태조5) 울주군기관으로 있을 때 군수 이은과 함께 일본에 부로로 갔는데 이은을 군에 있을 때와 같이 대우하니 왜인이 예절에 감복하고 이은과 같이 방환했다. 왕이 그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승계하고 봉열대부 예빈, 소윤 좌군사직을 제수하였다. 그후 일본 유구도를 40여차례 래왕하면서 본국 및 중국의 부로 600여명을 데려왔고 대마도 정벌 때 중군병마부사로서 공을 세웠다. 1443년(세종25) 대마도주 중정성과 삼포조약을 체결 조정으로부터 공배가 내렸고 절충장군용기위사상호군에 승진되고 자헌대부지 중추원사세자 좌빈객을 역임했으므로 후손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시조의 발상지인 울주의 별호가 학성이므로 학성이씨라고 한다. 시조의 향사일은 음 9월9일이고 석계서원에 제향.

 

<행 렬 자>

 

15(中중) 16(錫석 鍾종) 17(洛락 洙수) 18(東동 樹수) 19(煥환 杰걸) 20(埰채 在재) 21(鎬호)

 

韓山李氏(한산이씨)

 

시조 윤경(允卿)은 고려 숙종 때 지방의 호족으로 권지호장직에 있었으며 그의 7세손 색(문정)은 원나라에 들어가 원나라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원의 관직에 등용되었다가 귀국하여 대사성, 대제학, 지공거 문하시중 등 요직에 수차 등용되었고 1362년(공민왕11) 홍건적란에 왕을 호종하여 공을 세워 한산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본관을 한산으로 하였다.

 

<행 렬 자>

 

17(在재) 18(承승) 19(稙직) 20(珪규) 21(求구) 22(馥복) 23(遠원) 24(濬준 洙수) 25(석 禾화) 26(均균 培배) 27(淳순 灝호) 28(來래 穗수)

 

咸安李氏(함안이씨)

 

원조 원서는 고려 때 위위사주부동정을 지내고 파산(함안의 고호)에 세거하였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함안으로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후 세계가 실전되어 상고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원손인 상(광록대부, 파산군)을 시조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행 렬 자>

 

22(奎규) 23(鎭진 鎔용) 24(洙수 洛락 浩호 求구) 25(相상 根근 재 彬빈) 26(烈열 熙희 性성 杰걸) 27(敎교 載재 喆철 坤곤) 28(鉉현 善선 欽흠 鏞용) 29(漢한 淳순 海해 永영)

 

咸平李氏(함평이씨)

 

시조 언(彦)은 고려 광종 때 신무위대장군으로 함풍(함평의 고호)군에 봉해졌고 그의 고손 광봉은 충숙왕 때 삼사사로 벽상삼한삼중대광보국승록대부좌명공신으로 함풍부원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을 함평이라 했다.

 

<행 렬 자>

 

23(儒유) 24(緖서) 25(敏민) 26(憲헌) 27(啓계) 28(範범) 29(載재) 30(行행) 31(建건) 32(聖성 賢현) 33(奎규) 34(善선) 35(源원) 36(植식) 37(熙희) 38(基기) 39(鎭진 鎬호) 40(洙수) 41(秉병) 42(烈열 裕유)

 

陜川李氏(합천이씨)

 

비조는 신라 6촌중 하나는 알천 양산촌의 촌장으로 전하는 알평이다. 그의 후손 개(시호: 문충)가 신라말에 강양군(협천의 고호)으로 합천에 거주하면서 호장이 되었기 때문에 그를 시조로 삼고 협천을 본관으로 해서 세계를 계승하고 있으며 선군이후 8명이 봉군되었다. 묘소는 합천군 용주면 월평리에 있으며 향사일은 10월1일이다.

 

<행 렬 자>

 

33(煥환 炯형) 34(基기 均균) 35(鎬호 銖수) 36(淳순 제) 37(根근 枓두) 38(烈열 燁엽) 39(在재 載재) 40(錫석 鏞용) 41(泰태 浩호) 42(相상 林임) 43(熙희 炅경) 44(培배 坤곤) 45(鎭진 錞순) 46(洙수 淇기) 47(東동 榮영) 48(炳병 烘홍)

 

海南李氏(해남이씨)

 

시조 지형은 고려조에 태자 소경이었다. 해남 이씨는 고려시대에 참영호족이었으나 선계는 실전되어 알 수 없고 후손들이 해남에 세거함으로써 본관을 해남이라 하였으며 지형을 시조로 삼고 있다.

 

<행 렬 자>

 

24(根근) 25(炫현) 26(均균) 27(鎬호) 28(洪홍) 29(相상)

 

海州李氏(해주이씨)

 

시조 선은 진사로 남부참봉을 역임했다. 덕수이씨에서 분적한 그는 원수의 장자이며 이(율곡)의 백형이다. 해주 석담에 낙향세거하면서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대표작으로 <지혜주머니>가 있다. 이곳에 세거한 후손들은 본관을 해주라고 하였다. 자는 백헌 호는 죽곡이며 묘소는 경기도 파주군 전현면 동문리 자우산에 있다.

 

<행 렬 자>

 

20(彬빈) 21(魯노) 22(信신) 23(迪적) 24(錫석) 25(默묵) 26(俊준) 27(燮섭)

 

洪州李氏(홍주이씨)

 

시조 유성(維城)은 고려 대장군 한의 아들이다. 그의 9세손인 기종이 내시연경궁제학으로 홍양(홍천의 고호)부원군에 봉해져 그 후손들이 본관을 홍주로 해서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유성은 1202년(신종5) 지합문사로 경주에서 이비 발좌등이 발란을 일으키자 초토처치병마우도부사가 되어 우도사 강순의와 함께 출정하여 난을 평정하였다. 신종초에 서경부유수가 되었다.

 

<행 렬 자>

 

24(榮영) 25(熙희) 26(圭규) 27(錫석) 28(淳순) 29(桓환) 30(燁엽) 31(基기) 32(鍾종) 33(淵연) 34(根근) 35(炳병) 36(載재) 37(鉉현) 38(永영) 39(楨정)

 

花山李氏(화산이씨)

 

시조 용상(龍祥)은 안남국왕 이천조의 아들로 나라가 망할 것을 예언하고 우리나라에 망명 웅진 화산에 정착세거 하였다. 고려 고종이 이를 가상히 여겨 화산군에 봉하고 그곳을 식읍으로 하사했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본관을 화산으로 하였다.

 

<행 렬 자>

 

28(錫석 秉병) 29(永영 亨형) 30(相상) 31(勳훈) 32(培배) 33(鎭진) 34(益익) 35(東동) 36(敎교) 37(承승) 38(植식) 39(顯현) 40(載재)

 

懷德李氏(회덕이씨)

 

시조 몽은 능양군의 후예로서 상계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는 국가에 공이 있어 회덕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을 회덕으로 하고 그를 시조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묘소는 상망월 리간좌에 있다.

 

<행 렬 자>

 

14(道도 杓표) 15(基기 尙상) 16(斗두 東동) 17(聖성 鎭진) 18(根근)

 

興陽李氏(흥양이씨)

 

시조 언림(彦林)은 고려 의종 때에 병부상서 공부상서 상서우복사 등 요직을 역임했으며 그후 흥양에 낙향 정착세거하여 후손들은 본관을 흥양으로 하였다. 흥양은 고흥의 속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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