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염씨(廉氏(坡州))


 파주 염씨는 중국 황제의 후손으로서 헌원씨때는 공손씨라 하였으나 희수지방에 이거하면서 희씨로 개성했다. 그 후 희창의의 아들 전욱, 전욱의 증손이 대염씨라 했다가 다시 왕보씨로 개성했다. 그의 후손이 중국 하동에 이주하면서부터 염씨로 개성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후 삼한공신으로 벼슬이 대사도(호조판서의 별칭)에 이르렀던 교명이 후당시(신라말기)에 난을 피하여 우리나라 봉성(파주고호)에 들어와 잉거하게 됨으로써 염씨의 동래 시조가 되었고 그의 후손인 제신(시호 충경)은 1304년(고려 충렬왕30)에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11세 때 원나라에 들어가 고모부 말길(관직평장사)의 집에서 10년 동안 수확하고 정동 성랑중이 되었다가 어머니의 병환으로 인하여 환국한 후 충목왕때 수성익재공신으로 삼사우사 도첨의평리, 찬성사를 역임하고 공민왕때에 좌우 정승을 거처 단성수의동덕보리공신으로 벽상삼한삼중대광, 도첨의문하시중에 이르러 곡성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는 5조를 역사하면서 출장입상으로 30여년 동안 내외난을 평정하는데 많은 공적을 남겼다. 공민왕은 그의 공을 가상히 여겨 친히 유상을 그려 주었는데 그 유상은 후손들이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다. 제신의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강남면 대곡원해좌이며 나주의 금강서원 보성의 청계영당, 자인의 구연사, 재령의 청수사, 옥천의 용강서원, 단천의 송산사, 보령의 수현사, 함양의 반계영당, 대덕의 호평영당, 영월의 추원사등에 제향되었다. 염씨의 본관은 처음에는 봉성으로 하였으나 중시로(1세조)인 제신이 곡성부원군에 봉해지자 곡성으로 개관하였고 그후 곡성현이 단원으로 개칭되자 다시 단원으로 개관하였다가 1504년(연산군10)에 단원이 다시 파주로 개칭됨에 따라 종중의 합의 끝에 또다시 파주로 개관하게 되었다. 이밖에 담양, 용담, 개성, 순창 등 70여본이 나타나 있으나 모두 파주 염씨와 동근동원이며, 파주염씨 단본으로 알고 있다.

<행 렬 자>

 

16(相상 振진) 17(煥환 德덕) 18(在재 廷정 章장) 19(鉉현 錫석) 20(洙수 永영) 21(東동 秉병) 22(燮섭 烹팽 烈열 憲헌) 23(圭규 基기 思사 時시) 24(善선 鎬호 鈺옥) 25(澈철 泰태 淳순) 26(植식 來래 杰걸) 27(炯형 魯노 熹희) 28(敎교 均균 坤곤) 29(會회 鍾종 鎰일) 30(承승 求구 浩호) 31(采채 秀수 柱주) 32(默묵 熙희 薰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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