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씨(鄭氏)


 정씨는 문헌에 210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30본을 제외한 나머지는 미고이다. 우리나라 정씨의 원조는 삼국유사에 전하는 신라 6촌중 자산 진지촌의 촌장인 지백호이다. 그리고 정씨는 서산 랑야를 제외하고는 모두 지백호의 후손이며 경주정씨가 큰 집이라는 데는 반론이 없는 것 같다. 서산정씨는 중국금화부포강현절강인정웅중의 증손 신보가 우리나라에 망명하여 서산에 정착세거 하였는데 그의 아들인 인경을 시조로 하고 있다. 정씨는 1930년 통계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106082세대로서 전국 성씨중 5위를 차지하는 대성이다.

慶州鄭氏(경주정씨)

 시조 지백호(낙랑후)는 경주 화산에 강임하여 부족국가이던 삼한시대의 진한 사로 6촌장중의 수장으로서 동남쪽에 위치한 진지부의 촌장이 되고 서기전 69년 3월에 박혁거세를 양육하여 서기전 57년(박혁거세1)에 박혁거세를 국왕으로 추재하고 나라 이름을 신라라고 하였다. 그는 건국좌명공신이 되고 서기 32년(유리왕9)에 진지부가 본피부라 개칭되면서 낙랑후에 봉해졌으며 정씨라는 성을 하사받았다. 그리고 득관조 정진후(시호: 문정)는 고려조에 문과에 급제하고 금자광록대부, 정당문학, 병부상서겸군기사윤, 평창사 등의 요직을 역임하고 월성(경주)군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그를 득관조로 하고 본관을 경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묘소는 경북 월성군 내남면 로곡리에 있으며 음10월10일에 향사한다.

<행 렬 자>

(문정공파)

24(行행) 25(海해) 26(東동) 27(薰훈 煥환) 28(址지 奎규 載재) 29(鎬호 鉉현) 30(澤택 泰태) 31(稙직) 32(愿원) 33(埰채) 34(鎰일) 35(求구) 36(樂락)

 

(충장공파)

1(亨형) 2(台태) 3(慶경) 4(구) 5(相상) 6(煥환) 7(時시) 8(鉉현) 9(永영) 10(朝조) 11(炳병) 12(均균) 13(鍾종) 14(洙수) 15(樂락) 16(燮섭) 17(坰경)

 

固城鄭氏(고성정씨)

 

시조 정가물(鄭加勿)은 고려 때의 인물로 사적과 행장이 모두 실전되어 미고이다. 선대로부터 칠성(고성의 별호)에 토착한 호적으로 후손들이 본관을 고성으로 해서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행 렬 자>

23(憲헌) 24(鍾종) 25(泳영) 26(來래) 27(熙희) 28(膺응) 29(鎬호) 30(溫온)

 

昆陽鄭氏(곤양정씨)

 

중시조 정기용(시호: 충의)의 선세계는 상고할 수 없으나 정철석의 증손이요 정의걸의 손자이며 좌찬성 정호의 아들이다. 그는 1586년(선조19) 무과에 급제하고 병마절도사 신립의 휘하에 들어갔다. 그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큰 공을 세우고 여러 관직을 거쳐 1610년(광해군2) 상호군에 승진하고 1617년 3도통제사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에 올라 통영의 진중에서 죽었다. 상주의 충렬사에 제향.

 

光州鄭氏(광주정씨)

 

시조 정신호(鄭臣扈)는 광주에 세거한 사족으로 신라6부 촌장의 한 사람인 지백호(낙랑복)의 후예 극중의 후손이다. 극중은 고려조에서 금자광록대부참지정사를 지냈으며 신호는 고려 충숙왕 때 판도사사, 상호군 또는 봉은사 진전직으로 삼중대광문하찬성사에 추증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본관을 광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행 렬 자>

23(思사) 24(胤윤) 25(雨우) 26(寧녕) 27(義의) 28(熙희) 29(庸용) 30(宰재) 31(憲헌) 32(啓계)

 

錦城鄭氏(금성정씨)

 

시조 정성(鄭盛)은 하동 정씨의 시조 손위의 2자 세유의 12세손으로 1330년(충숙왕17) 문과에 급제하여 대광보국숭록대부에 올랐으며 금성(나주의 별호)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하동 정씨로부터 분적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행 렬 자>

22(煥환) 23(圭규) 24(鍾종) 25(永영) 26(秉병) 27(默묵) 28(培배) 29(鉉) 30(海해) 31(模모) 32(熙희) 33(均균) 34(鎬호) 35(洙수) 36(榮영) 37(勳훈) 38(埈준) 39(鎭진) 40(淳순)

 

金浦鄭氏(김포정씨)

 

시조 정응문(鄭應文)은 김포 사람으로 1128년(인종6) 어사대중승으로 있을 때 마침 남해안 일대에 떼도둑이 창궐하자 안무사로 나가 그들을 초무하였다. 해적 좌성동 820명이 귀순해 오자 합천삼기현에 기원, 취안, 진주 의령 현에 화순장을 설치하여 그들을 수용하고 생활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그의 증손 초가 이부상서에 이르는 등 후손들이 김포 호족의 일문을 이루고 보관을 김포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행 렬 자>

20(九구) 21(光광) 22(祚조) 23(錫석) 24(國국) 25(煥환) 26(鉉현)

 

羅州鄭氏(나주정씨)

 

시조 정해(鄭諧)의 선세계는 고증이 없으므로 상고할 수 없다. 그는 고려 중엽 때의 사람으로 증손 가신이 고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벽상삼한삼중대광수사도를 지냈으므로 그도 군기감에 추증되었다 한다. 그후 후손들이 나주에 정착세거하면서 가세가 번창해 지고 많은 명신현유를 배출하였으므로 정해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나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행 렬 자>

24(會회) 25(遇우) 26(勉면) 27(光광 炳병) 28(均균 衍연) 29(鍾종 茂무) 30(洙수 範범) 31(相상 廣광) 32(烈열 奇기) 33(在재 喜희) 34(鎬호 揆규) 35(永영) 36(植식) 37(大대) 38(奎규)

 

낭야鄭氏(낭야정씨)

 

시조 정선갑(鄭先甲)은 본래 명나라 사람으로 진사로서 9의사의 한 사람이다. 그는 청군의 포로로 심양관에 구금되어 있을 때 마침 병자호란에 인질로 그곳에 집계되어 있던 봉림대군과 친교를 맺게 되어 소현 세자가 귀국할 때 배종하여 래조했다가 귀화하여 우리나라에 살게된 후손들은 본향 랑야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행 렬 자>

7(淳순) 8(植식) 9(煥환) 10(在재) 11(鏞용)

 

東萊鄭氏(동래정씨)

 

우리나라 정씨의 근원은 서기 32년(신라 유리왕9) 6부중의 진지촌장인 지백호를 정씨로 사성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동래정씨 세보에 의하면 지백호와의 관계는 문헌이 없어 상고할 수가 없고 다만 시조 정지원은 회문의 원손으로 세계가 확실한 그로부터 기세 하였다고 한다. 지원은 고려에서 보윤호장을 지냈으며 후손들이 현달함에 따라 세거지인 동래를 본관으로 해서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행 렬 자>

33(愚우) 34(鳳봉) 35(會회) 36(可가) 37(茂무) 38(紀기) 39(庸용) 40(鍾종) 41(廷정) 42(揆규)

 

奉化鄭氏(봉화정씨)

 

시조 정공미는 고려 초기에 정의대부 호부령을 지내고 983년(성종2) 전국에 12목을 두게 되면서 호장이 되었다. 그의 5세손 도전(시호: 문헌)은 창왕을 폐하고 공민왕을 추대하여 좌명공신이 되고 봉화현 충의군에 봉해졌으며 이태조의 조선 개국에 공이 커 다시 봉화백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본관을 봉화로 하였다. 묘소는 경북 봉화군 다대기에 있다.

 

<행 렬 자>

21(應응) 22(在재) 23(鍾종) 24(洙수 淳순) 25(炳병 광) 26(燮섭 熹희 然연) 27(基기 圭규) 28(鎔용 광 銑선) 29(泰태 洛락) 30(榮영 東동) 31(思사 翊익 炫현) 32(重중 堯요 培배) 33(鎬호 鍵건 鏞용) 34(濟제 제) 35(樂락 根근 宋송) 36(熙희 烈열 焄훈) 37(吉길 五오 孝효) 38(錫석 우 欽흠) 39(求구 海해)

 

西京鄭氏(서경정씨)

 

시조 지상의 선세계는 상고할 수 없으나 그는 1114년(고려예종9) 문과에 급제하고 좌정언, 지제고 등을 지냈으며 묘청의 난 때 김부식에 의해 참살당했다. 역학과 노장철학에 조예가 깊었고, 시, 서, 화에 뛰어났다. 그의 후손 웅린은 1510년(증종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군수, 지평, 장령, 사간, 직제학 동부승지, 대사간 등을 역임하고 1527년 부평부사가 되었다.

 

瑞山鄭氏(서산정씨)

 

시조 인경(仁卿)(시호: 양열)의 선세계는 중국 금화부포강현절강인 응충으로서 그는 송나라에서 판장작감을 지냈고 그의 증손 신보는 송나라에서 상서형부원외랑으로 있다가 나라가 망하자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로 망명하여 서산에 정착세거하였다. 신보의 아들이 곧 인경인 바, 그는 1254년(고종41) 문과에 급제하고 충렬왕이 세자로 원나라에 머물 때 호종 했고, 1269년(원종10) 세자가 귀국하여 파사부에 이르렀을 때 임연이 원종을 폐하고 안경공 창을 옹립한 사실을 보고하여 세자로 하여금 다시 원나라에 가게 했다. 1274년 충렬왕이 즉위하자 2등공신에 오르고 고향 부성현이 서주군으로 승격되었다. 그후 1299년(충렬왕25) 판삼사가 되어 정조사로 원나라에 다녀오고 도첨의찬성사를 거쳐 중찬으로 은퇴 벽상삼한삼중대광추성정책안사공신이 되었으며 일찍이 원나라 황제로부터 무덕장군 정동성리문관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시조의 정착지인 서산을 본관으로 하였다. 서산의 송곡사에 제향, 묘소는 충남 서산군에 있다.

 

<행 렬 자>

20(萬만) 21(九구) 22(昞병) 23(永영) 24(璣기) 25(弼필) 26(康강) 27(章장) 28(重중) 29(采채) 30(源원) 31(相상) 32(煥환) 33(均균) 34(柱주) 35(熙희) 36(圭규) 37(鎭진) 38(泓홍) 39(植식)

 

野城鄭氏(야성정씨)

 

시조 가후(可侯)는 고려 희종 때 대사도가 되었으며 일본을 정벌할 때 많은 공을 세웠으므로 야성(영덕의 고호)군에 봉해졌다. 그러므로 후손들은 본관을 야성으로 하였다.

 

<행 렬 자>

21(世세 民민) 22(仁인 東동 復복) 23(象상) 24(默묵 應응) 25(達달 翼익) 26(鉉현) 27(永영) 28(植식 根근) 29(輝휘 榮영 燦찬) 30(在재 喆철) 31(鍾종 鎬호) 32(源원 澈철) 33(柱주 杓표) 34(炳병 鼎정) 35(中중 培배) 36(欽흠 鎔용)

 

延日鄭氏(연일정씨)

 

시조 습명(襲明)(시호: 영양)은 고려 의종때의 중신으로 추밀원지진사를 지냈으며 그의 선대에 의경이 연일호장을 지냈고 다시 연일현백에 봉해졌으므로 그 후손들이 본관을 연일로 하였다. 시조의 묘소는 경북 연일군 대송면 남성동 향사일은 10월10일이다. 그러나 원래 연일정씨의 비조는 신라 6부시대의 지백호로서 서기 32년(유리왕9) 경주의 6촌지명을 개칭함과 동시에 각각 사성하였는데 당시 제4자 산진지부의 장이었던 지백호는 정씨로 사성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연대가 멀고 고증이 없으므로 계대를 상고할 수 없어 지백호의 원손 종은을 도시조로 또 그 후손 습명을 1세 시조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혈손이면서 본관을 오천으로 하는 계통(정철계)이 있으나 분파 세계를 고증할 문헌이 없으므로 합보가 되지 못하고 있다.

 

<행 렬 자>

23(夏하 範범) 24(休휴 翰한 玉(변) 台태) 25(裕유 虔건 采채) 26(致치 在재 煥환 顯현) 27(鎭진 基기 九구) 28(淵연 海해 源원 鎔용 載재) 29(植식 東동 相상 永영 箕기) 30(炳병 容용 熙희 煥환 和화 華화) 31(起기 基기 克극 在재 圭규 培배 然연) 32(鉉현 鍾종 錫석 鎬호 敎교 喆철)

 

盈德鄭氏(영덕정씨)

 

시조 자영은 도의 아들로서 1434년(세종16) 알성문과에 을과 2등으로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1467년(세조13)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학문을 즐겼고 특히 역학에 밝았으며 예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또한 그 후손 홍의 아들 영국은 1594년(선조27)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역임했으며 춘추관기주관으로 임진왜란 때 소실된 역대실록 중간에 참여했고 1616년(광해군8) 좌통례로 춘추관편수관이 되어 선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醴泉鄭氏(예천정씨)

 

시조 소유는 고려 때 지면주사를 지냈고 그후 병마사를 지낸 남진을 파조로 하는 일파가 있다. 그 후손들은 경기도 광주 일원에 수십가구가 살고 있다.

 

溫陽鄭氏(온양정씨)

 

시조 보천(普天)은 고려 때 은청광록대부호부상서를 지냈고 그의 선세계는 실전되어 상고할 수 없으나 전하는 바에 의하면 탕정(온양의 고호)군에 백제 땅으로 고려 태조가 유검필과 함께 이곳 탕정군에 왔을 때 고을 관리에 공이 있음을 보고 정씨에게 관을 제수하고 그 후손들은 그 군의 향직인 호장이 되게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후손들이 온양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묘소는 충남 아산군 은양읍에 있다.

 

<행 렬 자>

22(煥환) 23(時시) 24(구) 25(一일) 26(相상) 27(必필) 28(喆철) 29(鎭진) 30(澤택) 31(彬빈) 32(炯형) 33(圭규) 34(鍾종) 35(淳순) 36(權권)

 

全州鄭氏(전주정씨)

 

시조 원흥(元興)의 선세계는 연일 정씨로서 고려 때 예조 판서를 역임한 작의 3자이며 원철(이판) 원백(병판)의 아우이다. 그는 고려 예종 때 장례원판결사로 피견 전주로 유배되어 정착세거한 그의 후손들이 연일에서 분적하여 본관을 전주로 하고 있다.

 

<행 렬 자>

34(然연) 35(在재) 36(鎬호) 37(淵연) 38(桂계) 39(煥환) 40(城성) 41(鐸탁) 42(淳순) 43(松송) 44(炯형) 45(壎훈) 46(鉉현) 47(洙수) 48(相상) 49(燦찬) 50(址지) 51(鏡경) 52(海해) 53(柱주) 54(炅경) 55(均균)

 

定山鄭氏(정산정씨)

 

시조 치형은 종아의 아들로서 1476년(성종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다. 그 후손들은 황해도 곡산에 수십가구 살고 있다.

 

貞州鄭氏(정주정씨)

 

시조 문청은 고려 현종때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랑장에 이르렀다. 장과 준을 파조로 여러 파가 있다. 정주는 풍덕의 별호이다.

 

晋陽(晋州)鄭氏(진양진주정씨)

 

진양(진주) 정씨의 원유는 삼국유사에 전하는 신라 6촌중 자산 진지촌(본피부)의 촌장 지백호로부터 흐르고 있다. 그러나 그후 세계가 실전되고 각기 시조를 달리하는 진양정씨가 8파나 되어 진주 8정이라고들 일컫는다. 그러나 근일에 와서 영절공 정예를 진주정씨의 비조로 하여 대동보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오늘날의 8정이 모두 예의 후손인지는 알수 없는 일인 것이다. 아무튼 진양정씨의 소목계통은 밝힐 수 없고 이를 크게 분류하면 정예, 정자우, 정장, 정억을 시조로 하는 4파로 나눌 수 있다.

 

<행 렬 자>

(예계)

27(宅택) 28(重중 燦찬) 29(奎규 鑑감) 30(鍾종 一일) 31(源원 仁인) 32(三삼 休휴) 33(憲헌 壽수) 34(五오 吉길) 35(鎭진) 36(浩호) 37(柱주) 38(炳병) 39(基기) 40(錫석) 41(泰태) 42(相상)

 

(수계)

23(漢한 海해 濟제) 24(植식 模모 采채) 25(然연 炳병 炯형) 26(基기 孝효 達달) 27(鍾종 鎔용 鎭진) 28(泰태 浩호 洙수) 29(相상 秉병 來래) 30(炫현 熹희 爀혁) 31(在재 圭규 埰채) 32(錫석 鎬호 鎰일) 33(永영 淳순 澤택) 34(彬빈 杓표 根근) 35(炅경 煐영 燦찬)

 

(자우계)

18(후) 19(銘명) 20(洙수) 21(東동) 22(煥환) 23(載재) 24(鎬호) 25(源원) 26(植식) 27(然연) 28(周주) 29(鍾종) 30(永영) 31(秉병) 32(悳덕) 33(均균) 34(欽흠) 35(浩호) 36(根근) 37(熙희) 38(培배) 39(鎭진) 40(淳순) 41(炳병) 42(烋휴) 43(時시) 44(鎔용) 45(濟제)

 

(중공계)

24(河하) 25(柱주) 26(炳병) 27(基기) 28(鎬호) 29(泳영) 30(植식) 31(燮섭) 32(在재) 33(錫석) 34(泰태)

 

(장계)

21(運운) 22(和화) 23(容용) 24(基기) 25(鉉현) 26(洙수) 27(東동) 28(煥환) 29(敎교) 30(錫석) 31(洛락) 32(柱주) 33(烋휴) 34(圭규) 35(鏞용)

 

(억계)

14(喜희) 15(龍용) 16(東동) 17(魯노) 18(象상) 19(柱주) 20(煥환 默묵) 21(圭규 在재) 22(鎬호 鎔용) 23(永영 注주) 24(炳병 榮영) 25(熙희 烋휴) 26(基기 坤곤) 27(錫석 銓전) 28(求구 汝여) 29(根근 桂계) 30(煊훤 炫현) 31(堯요 均균) 32(鎭진 鍾종)

 

(택계)

28(民민) 29(愚우) 30(東동) 31(默묵) 32(在재) 33(鎭진)

 

靑山鄭氏(청산정씨)

 

원조 금강은 고려말 문하시중평장사로 조선개국공신으로 좌의정에 오르고 청산군에 봉해졌다. 그후 세계가 실전됨으로써 가선대부 사헌부대사헌으로 연산군에게 직간을 하다가 종성부교수로 좌천된 운결을 기1세하고 본관을 청산으로 하였다.

 

<행 렬 자>

14(永영) 15(和화) 16(箕기) 17(均균) 18(鍾종) 19(淳순) 20(東동) 21(煥환) 22(敎교) 23(鉉현) 24(泰태) 25(根근) 26(炳병) 27(圭규) 28(鎬호) 29(來래) 30(相상) 31(熙희)

 

淸州鄭氏(청주정씨)

 

시조 극경은 고려 의종때 중랑장을 역임. 그의 6세손 책은 충숙왕 때에 충주목사를 지냈으며 통헌대부판선공사, 삼중대광으로 청하(청주의 별호)군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본관을 청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행 렬 자>

24(昌창) 25(洛락) 26(柱주) 27(燮섭 烈열) 28(載재 在재) 29(鎭진 鎬호) 30(潤윤 源원) 31(寅인 震진)

 

草溪鄭氏(초계정씨)

 

시조 배걸(시호: 홍문)은 초계성산에 세거하였으나 그 선세계는 상고할 수 없다. 그는 1017년(고려현종8) 문과에 장원하고 문종때 예부상서, 중추원사를 지냈으며 사학을 창시하여 홍문공도를 이루었는데 12공도중 문헌공도와 함께 최성하여 유가의 대가요. 백세의 존사라 일컬었다. 홍문광학추성찬화공신으로 개부의 동삼사수태위문하시중상주국광유후에 이르고 초계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초계로 본관을 삼았다. 묘소는 경남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 옥전자좌이며 향사일은 음3월1일과 10월1일이다.

 

<행 렬 자>

(내급사공파)

25(汝여) 26(猷유) 27(學학) 28(善선) 29(永영) 30(寅인) 31(憲헌) 32(用용) 33(九구) 34(雨우) 35(河하) 36(晟성) 37(起기) 38(漢한)

 

(천호장공파 상도파)

25(彦언 周주) 26(鎭진) 27(承승) 28(善선 樂락) 29(永영 煥환) 30(寅인 秀수) 31(憲헌 燮섭) 32(載재 甲갑) 33(九구 鎬호) 34(雨우 丙병) 35(河하)

 

(천호장공파 호남파)

25(道도) 26(國국) 27(基기) 28(時시) 29(鎬호) 30(澈철) 31(秉병) 32(煥환) 33(喜희) 34(錫석) 35(海해)

 

(대제학공파 경산파)

25(逑구 相상) 26(燮섭 烈열) 27(時시 遠원) 28(鉉현) 29(洪홍 鴻홍)

 

(대제학공파 진주파)

25(在재 翰한) 26(奎규 和화) 27(弼필 顯현) 28(時시) 29(鎬호) 30(永영 徹철 泓홍) 31(相상 秉병 炳병) 32(煥환 熙희 烈열) 33(圭규 基기 均균) 34(鎭진 鉉현 錫석) 35(泰태 浩호 浚준) 36(桂계 根근) 37(炳병 煐영 炅경)

 

(대제학공파 관동파)

25(鴻홍) 26(和화) 27(顯현) 28(時시) 29(鎬호) 30(澈철) 31(秉병 相상) 32(煥환 烈열) 33(圭규 在재) 34(鉉현 鍾조) 35(海해 浚준) 36(植식 根근) 37(容용 燦찬) 38(遠원 均균)

 

(박사공파 진정파)

25(成성) 26(猷유) 27(學학) 28(善선) 29(永영) 30(寅인) 31(憲헌 淳순) 32(圭규) 33(爀혁) 34(基기) 35(鎔용) 36(泳영) 37(穆목) 38(炳병)

 

(박사공파 강동파)

25(致치) 26(弼필) 27(相상) 28(然연) 29(均균) 30(鍾종) 31(燮섭) 32(秀수) 33(爀혁) 34(鉉현) 35(泰태) 36(根근) 37(烱경)

 

(대사성공파)

25(邦방 演연) 26(圭규 猷유) 27(鉉현 銖수) 28(永영 泰태) 29(乘승 相상) 30(容용 烈열) 31(基기 在재) 32(鎬호 錫석) 33(淳수 海해) 34(根근 植식) 35(熙희 然연) 36(均균 孝효) 37(錡기 錘추) 38(洙수 浩호)

 

河東鄭氏(하동정씨)

 

하동정씨는 본관을 같이 하면서 계통이 다른 3파가 있다. 그 중 한 계통은 삼한의 말기에 하동으로 향관하고 단련향병으로 그 지방을 지키다가 고려초에 호장으로서 향병을 이끌고 귀복하여 평장사에 오른 정도정을 시조로 하고 그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때 문하시중을 지낸 후손 석중을 1세조로 10세 정인지(시호: 문정) 12세 정여창(시호: 문헌) 등으로 이어져왔다. 다른 한 계통은 고려 개국초에 하동지방의 장으로 민병을 주관하던 사족의 후손으로 고려 덕종 때 문과에 급제금자광록대부, 도첨의좌정승, 검교태자첨사등을 지낸 정웅을 시조로 하고 본관을 하동으로 하여 6세 정희 7세 정초(시호: 문경)로 이어져 왔다. 또 다른 한 계통은 지백호의 원손(40세)으로 고려 숙종, 예종, 인종, 의종, 명종 등 5조에 벼슬하여 정헌대부, 지례부사, 응양대장군, 문하시중을 지내고 하동백에 봉해진 정손위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하동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행 렬 자>

(손위계)

25(文문) 26(兢긍) 27(善선) 28(雨우) 29(相상) 30(薰훈)

 

(응계)

24(徵징) 25(鳳봉) 26(昌창) 27(胃위) 28(德덕) 29(麟인 弘홍) 30(利이 壽수) 31(泳영 永영)

 

(도정계)

24(植식 采채) 25(炳병 燦찬) 26(均균 基기) 27(鎭진 會회) 28(洙수 永영) 29(柄병 集집) 30(燮섭) 31(敎교 致치)

 

咸平鄭氏(함평정씨)

 

시조 언겸은 신라 개국공신이며 6부 촌장의 한 사람인 지백호의 38세손이다. 그는 고려때 병부상서, 문하시중을 역임하였고, 1126년(인종4) 탁준경난 때 모평(함평의 고호)에 퇴거하여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함평을 본관으로 하였다.

 

<행 렬 자>

23(會회 軫진) 24(源원) 25(相상) 26(煥환) 27(在재) 28(鎬호 鈺옥) 29(濟제) 30(植식) 31(容용) 32(敎교) 33(鍾종) 34(求구) 35(東동) 36(燮섭) 37(圭규)

 

海州鄭氏(해주정씨)

 

시조 숙의 선세계는 문헌이 실전되어 상고할 수 없고 다만 그의 조상이 해주 수양산 밑에서 세거했던 사족으로 고려 때 정씨를 사성받았다고 전해온다. 그는 고려 신종 때 전법정랑을지내고 연면혈통을 이어 왔으나 병화로 문헌이 실전되어 4,5대의 계대를 밝히지 못하고 고려 말기에 숙의 후손 언, 초 형제를 1세조로 하고 2파로 분류 본관을 해주로 하고 각각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행 렬 자>

23(燮섭) 24(基기) 25(鉉현) 26(源원) 27(秉병) 28(默묵) 29(圭규) 30(鎬호) 31(雲운) 32(模모) 33(顯현) 34(準준) 35(鎭진) 36(永영) 37(柱주) 38(烈열) 39(在재) 40(鏞용) 41(海해) 42(杓표) 43(魯노) 44(吉길) 45(會회) 46(澤택) 47(相상) 48(勳훈) 49(喜희) 50(鍊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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