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金氏)

김씨의 본관은 <조선씨족 통보> 623본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본서에는 112본만 수록하고 나머지 성씨에 대하여는 미고이다. 김씨는 이를 크게  나누어 가락국 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수로왕계와 신라왕실의 박, ,  3성중의 하나인 김알지계로 볼  수 있는 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수로왕계>(가락국기) (삼국유사)에 의하면, 가락에는 본래 아도간, 여도간, 파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오천간, 신귀등 9(촌상)이 있어 각 지방을 다스렸는데 서기 42 9간들이 구지봉에 올라  신탁에 의하여 가락을 다스릴 군장을 얻고자  의식을 행하였더니 마침내 하늘에서 6개의 해만한 황금알을 담은 금합이 내려왔다. 이튿날 이 여섯 알이 동자로 화하여 그 중 먼저 나온 수로를 가락 (본가야)  왕으로 삼고 나머지 다섯 동자도 각기 5가야의 수장을 삼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란생설화는 비단 수로왕 뿐만 아니고 고주몽 박혁거세 석탈해등의  경우에서도 찾아 볼 수 있으나 수로왕의 경우는 황금알이 6개나 된다는데에 흥미를 더해준다.이 수로왕을 시조로 연면세계하고 이 성씨가 바로 김해 김씨인 바 수로의 후손 중에는 모성을 따르는 허씨도 있다. 수로왕의 비허황옥은 본래 야유타국(인도의 일국)의 공주로서 서기 48년 배를 타고 와서 왕비가 되었는데 그녀가 가야국에 상륙한 곳은 주포촌 비단비지를 벗어 산령에게 제사지냈던 곳은 릉현 붉은 기를 꽂고 들어오던 바닷가는 기출변 이라고 불리고 있다. 수로왕은 허왕후 몸에서  아들 10명을 두었는데 장자 거동은  김씨로 왕통을 잇게 하고 두 아들은 허왕후의 간곡한 요청으로 모성을 따라 허씨가 되었으며 나머지 7아들은 불가에 귀화하여 하동 7불이 되었다고 한다. 또 허씨에서  갈려나간 인천 이씨가 있는데 허기라는 사람이 신라의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가 그곳 천자로부터 이씨로 사성 받았다고 하며 뒤에 그 후손 이허겸이 소성후에 봉해지면서부터 이허겸을 시조로 하고 본관을 인천으로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근원이 다른 김해 김씨가 있다. 임진왜란 때 왜장 가릉청정의 좌선봉으로 왜병 삼천명을 이끌고 왔다가 조선의 문물을 흠모한 나머지 우리 나라에 귀화한 김충선(본 성명은 사야가)를 시조로 하는 김해 김씨를 말한다. 김충선은 기화한 후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 때 전공을 세우고 자헌  대부에 올랐으며 권율장군의 진청으로  성명을 하사받았다. 수로왕계의 김해 김씨는 유구한 역사를 가졌으면서도 분적된 사례는 없으나 분파된 수는 본서에 기록된 것만도 155파에 이른다. <김알지계>알지계는 경주 김씨를 주종으로 하고 신라 고려 이조에 걸쳐 600여 본관으로 분적되었으나 본서에는 110본을 기록하고 나머지  본관에 대하여는 미고이다. 김알지의 탄생에 대하여 삼국유사  삼국사기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보인다. 신라 4대 탈해왕 9년 봄  어느날 새벽 경주의 게림에서 기이한 닭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에 가 보았더니 울창한 송림 높은 가지에 금빛 찬란한 작은 궤가 걸려 있고 그  밑에서 흰 수닭이 울고 있었다. 그 궤를 가져와 열어보니 뜻밖에도  용모가 단정한 비범한 사내 아이가 들어 있는지라 『하늘에서 내리신 아들』이라하며 기뻐하며 길렀다. 이가 곧 알지이며 금궤에서 나왔다하여 성을 김씨라 하고 이를 기특히 여겨 왕으로부터 태자를  책봉하였으나 사양했다고 한다. 신라의 왕실계보를 보면 역대 56왕 중에  박씨가 10왕 석씨가 8왕 나머지 38왕이 김씨이다. 그러나 김씨의 왕위에 오른 것은 알지의  7세손이며 신라 13대 왕인 미추왕이 시초가 된다. 그리고 본서에 수록한 110본 중에서 신라  29대 무열왕의 5세손 김주원을 시초로 하는 강릉 김씨와 신라 제 45대 신무왕의 제3자 김광흥을 시조로 하는  광산김씨 그리고 신무왕의 후예인 김령이를 시조로 하는 영산(영동)김씨를 제외한 그 나머지는 거의가 신라 56대 경순왕의 후손이라 할 수 있다. 경순왕은 927년 후백제 견훤의 침공으로 경애왕이 죽은 뒤에 왕위에 오른  신라의 마지막 왕이다. 그가 재위하는  동안 군웅이 각처에 할거하여 국력이 쇠퇴하고 특히 뻔질나게 침공하여서는 약탈을 자행하는 견훤 때문에  국가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고려 태조는 그에게 유화궁을 하사하고  자기 딸 랑랑공주를 하가시켰으며 정승을 봉하고 경주를 식읍으로 하사하였는데 경순왕의 9아들 중 마의 태자로서 널리 알려진 장자일과 계자 굉을 제외한 나머지 7곱 아들은 랑랑공주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또한 알지계에서는 타성으로 갈려나가 후손이 있는데 김행은 안동권씨로 김순식은 강릉왕씨로 헌안왕자 후손 순백은 광산이씨로  헌안왕자 17세손 세광은 김천문씨로  경순왕자 은설의 13세손 영규는 수성최씨로 각각 개성하였다. 김씨는 우리나라  성씨 중에서 그 인구수에 있어서 제1위를 차지하고 있다. 1930년 국세조사에 따르면 김씨의 호구수는 749190세대로서 제 2위의 이씨보다  222716세대나 많다. 3위는 박씨로서 261357세대 제 4위가  최씨로 171262세대 제 5위는 정씨로 106082세대였었다. 흔히 명문을 말할 때 연안이씨 광산김씨 대구서씨 순으로 손꼽히고 있는데 이는 그 많은  김씨 가운데서 광산김씨가 으뜸가는 명문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 밖에도 김관자가 서말이라는 안동김씨 (세칭 장김)를 비롯하여 청풍김씨 정안김씨 경주김씨들도 지난날 쟁쟁한 명문 벌족이었다.

 

江陵金氏(강릉김씨)

 

시조 김주원은 신라 무열왕의 5세손으로 785년 선덕왕이 죽고 후사가 없자 군신회의 끝에 그가 왕으로 추재되었으나 갑자기 큰 비가 내려 알천을 건너갈 수가 없어 입궐을 못하게 되자 이는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고  즉위를 포기했다. 비가 개인 다음  그가 대궐에 들어가자 원성왕은 그에게 즉위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강릉에 내려간 후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원성왕은 그에게 명주(강릉)  군왕을 봉하고 명주익령, 근율어(평해)등 삼군을 다스리게 하여 그 땅을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그래서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강릉으로 하게 되었다. 묘소는 강원도 명주군 성산면 삼왕에 있다.

 

<행 렬 자>

34(秉병) 35(蓮연) 36(卿경) 37(振진) 38(起기) 39(南남) 40(來래) 41(東동) 42(猷유) 43(成성) 44(玄현) 45(萬만) 46(九구) 47()  48(寧령 衡형) 49(茂무)  50(紀기 範범) 51(庾유)  52(宰재) 53(聖성 重중) 54(揆규) 55(夏하) 56(元원) 57(斗두) 58(澤택) 59(吾오) 60(章장) 61(世세)

 

江華金氏(강화김씨)

 

강화 김씨는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분적계보와 계대소목은 상고 할 수 없고 등본 3파로 분류계세한 거승로 생각된다. 그 중  한 파는 경순왕의 3자 명종의  7세손으로 고려 명종때 삼지성사로 하음군(강화의 고호)에 봉해진 晟() 1세조로 하여 개성파라 하였고 다른 한 파는 명종의 18세손으로 연산군때 병조참판을 지내다가 무호사화 때 숙천으로 유배된  光을 1세조로 하여 숙천파라 하였고 또 다른 한 파는 光의 4세손으로 조선조에 훈련원주부를 지낸 松鶴(송학) 1세조로 하여  의주파라 하여 각각  계대하고 있는데 성이 하음백(강화)에 봉해졌으므로 그 후손들이 본관을 강화로 하게 된 것이다.

 

<행 렬 자>

(개 성 파)

22(學학) 23(泳영) 24(秉병) 25(烈열) 26(在재) 27(鉉현) 28(瀅형) 29(模모) 30(熙희) 31(培배) 32(鍾종) 33(淵연)

 

(숙 천 파)

21(得득 湜제) 22(學학 英영) 23(熙희 煜욱) 24(敬경 埰채) 25(泰태 鉉현)

 

開城金氏(개성김씨)

 

개성 김씨는 신라 경순왕의 4째아들 金錫(김석)이 의성군에  봉해짐으로써 본관을 의성으로써 오다가 석의 8세손 公瑀(공우)의 제3자 龍珠(용주)(시호충의)가 고려 문종때 문과에 급제한 후 四조에 걸쳐 누차 여진 정벌에 공을 세워 추충공신으로 지개성부사 평장사를 거쳐 개성군에 봉해짐으로써 그의 후손들이 용주를  1세조로 하고 보관을 개성으로 이적하게  된 것이다.  묘소는 개성 용종산 중봉에 있다.

 

<행 렬 자>

20(在재) 21(錫석 鉉현 鐸탁) 22(洙수 溫온 潤윤) 23(根근 植식 權권) 24(煥환 炳병) 25(基기 圭규) 26(鎬호 鉉현 鍾종) 27(泰태 浩호 泳영) 28(柱주 相상 榮영) 29(熙희 煥환 勳훈) 30(均균 培배)

 

慶山金氏(경산김씨)

 

경산김씨는 신라 김알지의 28세손이며 경순왕의  4자 殷說(은설)의 후손인 金育和(김육화)를 시조로 제대하고 있다. 김육화는  고려조에 은좌광록대부 사공이부상서 좌복사겸상장군을 지냈고 경산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경산을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행 렬 자>

19(培배) 20(樂락) 21(潤윤 淳순) 22(振진)

 

慶州金氏(경주김씨)

 

경주김씨는 신라왕실의 삼성(,  , ) 가운데  하나이다. 시조  金閼智(김알지) 65 (탈해왕9) 금성 서쪽 시림(계림)의 나무 끝에 걸려있던 금궤에서 태어났다하여 성을 김으로 하사했고 하늘이 내리신 아들이라 하여 길렀다. 그의 7세손인 미추왕에 이르러 비로소 신라왕위에 오르게 됨으로부터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알지의  28세손)에 이르기 까지 38왕이 연면상계하여 선원세계를 계승하였고 935년 경순왕이 고려태조 왕건에게 손국하자 그의 아들 9형제 중 1자 일은 망국의 한을 안고 입산하였고 2   ()은 나주김씨 3자 명종은 경주김씨 영분공푸 4자 은설은 경주김씨 은설공파 5자 錫()  의성김씨 6자 건은 강릉김씨 7자 선은 언양김씨 8자 추는 삼척김씨 9자 덕예는 울산김씨 등의 1세조가 되어 각각 세계하고 있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경주김씨는 경순왕의 제3자 명종과 제4자 은설로부터 기원이  되었고 그 후손들이 번성해짐에 따라 현달하는 인물 또는 세거지역을 중심으로 분파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파는 영분공파(1세조명종)  대안군파 (1세조은설) 병판공파(1세은설의  14세손 덕재) 백촌공파(1세조 은설의 17세손 문기) 정백공파(1세조 은설의 후손 정백) 판도판서공파(1세조 은설의 후손 장유) 태사공파(은설의 후손 인관) 장사랑공파(은설의 16세손 존일)  그리고 상계가 미상하여 소목 계통을 밝히지 못하지만 경순왕의 후손으로 전해진 순웅을 1세조로 한 순웅공파 순웅의 13세손 곤을 1세조로 한 계림군파 등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밖에 다른 문헌에는 위영으로부터 비롯하여 김부식으로 이엉져 온 호장공파가 있다고 전하나 공주, 부여, 일대에 거주하는 언양김씨 일파이고 실존하지 않는다.

 

<행 렬 자>

(두계공 <충유> )

35(孝효) 36( ) 37(泳영) 38(柄병) 39(熙희) 40(基기) 41(鍾종) 42(河하) 43(桂계) 44(然연) 45(圭규) 46(鎬호)

 

(수은공<충한>파후 쌍향당<>)

34(烈열 杰걸) 35(鍾종 萬만 重중  奎규 孝효) 36(燮섭 欽흠 秀수  旭욱 九구) 37(泳영 洪홍 會회 柄병 南남) 38(相상 秀수 永영 行행 宇우) 39(柄병 勳훈 成성 宰재 茂무) 40(重중 坤곤 弼필 起기) 41(康강 庸용) 42(宰재 翊익 達달) 43(廷정 憲헌 任임)

 

(판도판서공<서건>)

34(熙희 烈열) 35(址지 圭규) 36(鎬호 鎔용) 37(淳순) 38(東동) 39(炳병)

 

(월성부원군<천서>)

38(基기 相상 東동) 39(鐸탁 燮섭) 40(雨우 圭규 在재) 41(根근 鍊련 鍾종) 42(烈열 源원  洙수) 43(圭규 東동)

 

(충선공<>)

27(璡진 岳악) 28(甫보 鳳봉)  29(漢한) 30(模모) 31(炳병) 32(在재  基기) 33(鍾종) 34(濟제) 35(東동) 36(燮섭)

 

(병조판서공<덕재>)

21(喆철 基기 在재 圭규 赫혁)  22(鍾종 鎭진 錫석 鍊련) 23(永영  泰태 求구) 24(植식 根근 林임) 25(煥환 炳병 炯형 燦찬) 26(周주 培배 均균  埈준) 27(鎬호 鍾종 鎔용 鉉현) 28(洙수 淑숙 源원 淵연) 29(模모 相상 格격 桂계) 30(列열 喜희 熏훈)

 

(익화군<인찬>파·백촌공<문기>)

21(基기 在재 圭규 鎭진) 22(鍾종  錫석 鉉현 浩호) 23(泳영 洛락  蓮연 東동) 24(根근 模모 柱주 烈열 炳병) 25(炯형 炅경 勳훈 載재) 26(塤훈 垠은 志지 鉉현) 27(鎔용 鉦정 銀은 永영 洛락) 28(求구 河하 漢한 根근) 29(相상 格격 桂계 容용) 30(均균)

 

(계림군파)

20(植식   ) 21(學학 冠관 知지) 22(鍾종 鐸탁 基기 式식) 23(洙수 浩호 鎭진 榮영 是시) 24(東동 柱주 洙수 浩호 友수) 25(煥환  炫현 相상 胃위) 26(奎규 致치 煥환  勳훈 韶소) 27(鎭진 鎬호 奎규 在재 迎영 道도) 28(泳영 淳순 鉉현 厚후) 29(海해 根근 杰걸 泰태)

 

(장군공<순웅> 후 봉익대부<남기>공파)

17(東동 柄병) 18(烈열 杰걸) 19(奎규 孝효) 20(鉉현  欽흠) 21(泳영 洪홍) 22(植식 秀수) 23(炳병 勳훈) 24(重중 坤곤) 25(鍾종 鍵건) 26(洛락 泰태)

  

(판도판서<장유>공파)

17(泰태 鼎정) 18(秀수) 19(熙희) 20(基기  在재 敎교) 21(九구 鉉현 鎬호)  22(洪홍 永영 漢한) 23(植식 模모 桓환) 24(應응 炳병) 25(圭규) 26(鎭진)

 

(태사공<인관>후 상촌공<자취>)

24(載재 喜희 秀수) 25(商상 容용) 26(濟제 浩호 遠원) 27(東동 元원 欽흠) 28(煥환 烈열  冀기 鴻홍) 29(基기 周주 執집 植식) 30(鎬호 鍾종) 31(淵연 澤택 寧녕) 32(稙직 義의) 33(丙병 範범)

 

高靈金氏(고령김씨)

 

시조 金南得(김남득)은 의성군 (김석) 11세손으로  후의성군의 장손이며 김의의 장남이다. 그는 1340년에 진사가 되어 감찰집의가 되고 공민왕때 양광도안염사를 거쳐 판개성부사문하평리가 되었다. 1364년 원제가 최유의 간계에 속아 왕을  폐하고자 어사 뉴인을 보내어 사실을 조사할 때 김남득이 접반시랑이 되어 무고임을 역설 하였던바 원제가 크게 감회하고 계속 재위케했다. 그가 사은사로 원나라에가 예부상서를 명받고 환국하자 왕이 익재공신 고양부원군을 봉하였다. 그래서 후손들은 본관을 고령(고양)으로  하게 되었다. 묘소는 고령군 쌍림면에 있다.

 

<행 렬 자>

18(東동 相상) 19(烈열 顯현)  20(在재 圭규 用용) 21(鎬호  鉉현 鍊련) 22(泳영 海해  永영) 23(植식 桓환) 24(燕연) 25(堅견) 26(鎭진) 27(河하) 28(榮영) 29(炳병)

 

高山金氏(고산김씨)

 

고산은 현재 전북 완주군의 속면이다. 시조  (김환)의 아버지 윤옥 자는 중소로 1510(중종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벼슬이  전적에 이르렀다. 1930년의 조사에 의하면  그 후손 이 황해도 연백군 김산면 일곡리에 29호가 살고 있다.

 

固城金氏(고성김씨)

 

시조 김말로왕은 김수로왕과 함께 구지봉에서 탄강한 6동자중  제일 막내라 한다. 소가야국을 창건하고 도읍을 고성에 정했기 때문에 본관을 고성으로 했다. 묘소는 경남 고성군 회화면 금봉산간좌에 있다.

 

<행 렬 자>

53(炳병 性성) 54(喜희 奎규) 55(善선 庚경) 56(求구  洙수) 57(榮영 東동) 58(燦찬 煥환) 59(重중 在재) 60(鎔용 鎬호) 61(洪홍 永영) 62(植식 根근) 63(炫현 炅경) 64(載재 培배) 65(錫석 鍾종)

 

公州金氏(공주김씨)

 

비조 김알지의 후손 지대(청도김씨 시조) 8세손 의손(공주백)의 여덟 아들 중 용, , 3인이 북선에 이거하고 선고의 작위로 관을 삼아 3인이 다 공주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행 렬 자>

16(敬경) 17(河하 鼎정) 18(相상 煥환) 19(燾도  洛락) 20(珽정 益익) 21(鎬호 烈열) 22(永영 如여) 23(秀수 喆철) 24(炳병 基기) 25(圭규) 26(錫석) 27(淵연) 28(根근) 29(煥환) 30(埈준)

 

光山金氏(광산김씨)

 

시조 金興光(김흥광)은 신라 신무왕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장차 국난이 있을 것을 미리 알고 광주 서일등에 자리를 잡고 그곳에서 살았다. 그리하여  그 후손들이 본관을 광산으로 하게 되었고 후손 가운데 평장사가 계속 8명이 배출되자 세상 사람들이 그곳을 평장동이라 불렀다.

 

<행 렬 자>

30(萬만) 31(鎭진) 32(澤택) 33(相상) 34(基기) 55(在재) 36(鉉현) 37(永영) 38(洙수) 39(鎔용) 40(中중) 41(善선) 42(淳순) 43(東동) 44(煥환) 45(奎규) 46(鎔용) 47(海해) 48(植식) 49(炯형)

 

廣州金氏(광주김씨)

 

시조 金祿光(김록광)은 경순왕 부의 제 5  () 7세손으로서 고려때 광주군에 봉해지고 광주를 식읍으로 하사 받았다. 그래서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광주로 하게 되었다.

 

<행 렬 자>

20(相상 東동) 21(煥환 燮섭) 22(在재 基기) 23(鎭진  鎬호) 24(泰태 漢한) 25(柱주 根근) 26(炳병 熙희) 27(坤곤 均균) 28(銖수 鉉현) 29(洪홍 淳순) 30(楨정 秉병)

 

交河金氏(교하김씨)

 

시조 金孟貞(김맹정)은 신라 종실의 후예로 선세계는 나주김씨이다. 고려 인종때 장군으로 1135년 묘청의 난을 토평한 공으로 교하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그 후손들이 본관을 교하로 삼았다.

 

<행 렬 자>

55(是시 鍾종) 56(魯노 允윤) 57(玉옥 履이) 58(學학  元원) 59(良양 基기) 60( 후 澤택) 61(鍵건 春춘) 

 

金寧金氏(금녕김씨)

 

시조 金時興(김시흥)은 대보대왕 김알지의 39세손이다. 그는 고려조에서 공을 세우고 금녕군에 봉해졌는데 금녕은 김해의 고호이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김해로 하면서 선김(김수로 계 : 김해김씨)과 후김(김시흥 계  : 김령김씨)으로 각각 분별해 왔다.  그러나 오랜 세대가 흐르고 후손들이 번창 함에 따라 양김의 후손들 간에는 혹은 자기 자신도 선김의 자손인지 후김의 자손인지 조차 분별치 못한  폐단이 있게 되자 현종때에 이르러  이조일관의 혼잡을 피하기 위해 김녕군의 후예는 다시 김해의 고호인 금녕으로 이관하게 되었다.

 

<행 렬 자>

(영돈령공<>)

23(廷정) 24(季계) 25(炯형) 26(基기)27(錫석) 28(永영) 29(彬빈) 30(炳병)31(均균) 32(鍾종) 33(汶문) 34(東동)35(炫현) 36(重중) 37(鍊련) 38(洪홍)

 

(충의공<문기>)

23(溶용 洸광) 24(權 模모 柱주) 25(炯형 炳병  炫현) 26(圭규 基기 培배) 27(鎭진 鍾종  鍊연) 28(淵연 洙수 泰태) 29(楨정 東동 秉병) 30(燁엽 燮섭 烈열) 31(埰채 在재 祉지) 32(鉉현 鎬호 鍵건) 33(浚준 泳영 浩호) 34(柄병 根근 相상) 35(煥환 熺희 熙희) 36(埈준 坤곤  均균) 37(銅동 鏞용 鈺옥) 38(漢한 洛락 永영)

 

(대사성공<>)

23(港홍 翼익) 24(秉병 柱주) 25(烈열) 26(奎규) 27(欽흠 鐥선) 28(雨우  永영) 29(休휴 杓표) 30(勳훈 熙희) 31(均균 坤곤) 32(鎬호 鍊련) 33(淵연  洙수) 34(來래 相상) 35(炫현 燮섭) 36(老로 載재) 37(鎔용 鍊련) 38(永영 溶용)                          

 

(도순찰사공<문제>)

23(溶용) 24(權권) 25(炯형) 26(圭규) 27(鎬호) 28(種종) 29(熙희) 30(均균) 31(銖수) 32(洪홍) 33(休휴) 34(根근) 35(性성) 36(基기)

 

(익화군<인찬>)

23(廷정) 24(學학) 25(朝조) 26(稙직) 27(顯현) 28(遠원) 29(鎬호) 30(泳영) 31(秉병) 32(煥환) 33(載재) 34(鍾종) 35(泰태) 36(相상) 37(容용) 38(圭규)

 

(진주목사공<>)

23(培배) 24(鍾종) 25(準준) 26(秉병) 27(容용) 28(志지) 29(鍊련) 30(承승) 31(述술) 32(鳴명) 33(圭규) 34(銖수)

 

(충간공<경의>)

23(永영) 24(鼎정) 25(榮영) 26(炅경) 27() 28(鍾종) 29(洙수)  30(秉병) 31(煥환) 32(重중) 33(鎬호) 34(河하) 35(柱주) 36(炳병) 37(基기)

 

(충전공<준영>)

26(相상 秉병) 27(燮섭 煥환) 28(喆철 基기) 29(鍾종  鎬호) 30(洙수 淳순) 31(植식 東동) 32(炯형 南남) 33(培배 均균) 34(鎔용 錫석) 35(浩호 淵연) 36(營영 柱주) 37(烈열 熙희)

 

(충경공<경세>)

23(煥환) 24(會회) 25(鎭진) 26(淇기) 27(來래) 28(然연) 29(珏각) 30(兌태) 31(壬임) 32(震진) 33(南남) 34(正정) 35(善선) 36(海해) 37(柱주) 38(炳병)

 

(만은공<길상>)

23(聖성) 24(浩호) 25(鉉현) 26(淵연) 27(權권) 28(炳병) 29(圭규) 30(鎭진) 31(淳순) 32(柱주) 33() 34(在재) 35(鎬호) 36(源원) 37(桓환) 38(熙희) 39(增증) 40(錫석)

 

(상서공<문희>)

23(溶용) 24(權권) 25(炯형) 26(圭규) 27(銑선) 28(洙수) 29(桂계) 30(煥환) 31(垠은) 32(鎬호) 33(浚준) 34(東동) 35(炳병) 36(坤곤) 37(鎭진) 38(泳영)

 

(송암공<>)

23(錫석) 24(永영) 25(稙직) 26(奐환) 27(周주) 28(鍾종) 29(旿오) 30(朝조) 31(溶용) 32(相상) 33(燮섭) 34(建건)

 

(선교랑공<구야>)

23(培배) 24(鍾종) 25(準준) 26(秉병) 27(容용) 28(志지) 29(鍊련) 30(承승) 31(述술) 32(鳴명) 33(圭규) 34(銖수)

 

錦山金氏(금산김씨)

 

시조 김선(金侁)은 김알지의 42세손이며 정보의 13세손으로 자는  윤직 호는 낙천제 시호는 충간이다. 그는 요양성참정을 지내고 귀국해서 금주(금산)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기 1세하여 시조로 삼고 본관을 금산이라 하였다. 묘소는 전북 무주군 안성면 공진리에 있다.

 

<행 렬 자>

22(赫혁) 23(鉉현) 24(漢한) 25(植식) 26(炳병 炯형) 27(培배 圭규) 28(鎬호 鎭진)

 

金堤 金氏(김제김씨)

 

시조 金天瑞(김천서)는 고려때 문하시중으로 월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김제에 세거하고 있었다. 그의 7세손 김정걸이 이태조를 도와 개국 3등공신이 되었고 태종 원년에는 다시 공을 추증받아 김제군이 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김제로 하였다.

 

<행 렬 자>

21(啓계 正정) 22(圭규) 23(仁인 鍾종) 24(麟린 河하) 25(珍진 榮영) 26(銘명 煥환)

 

金海金氏(김해김씨)

 

중국 한나라 광무황제 18년에 가락국의 구간(신귀등 9존장)이 함께 수대에서 놀다가 구지봉에 금합을 발견 곧 그를 열어보자 여섯 개의 알이 들어 있었고 그 알속에서 나온 여섯 동자가 나왔다고 그 가운데 제일 먼저 나온 수로를 가락국의 왕으로 추대하고 나머지 다섯 사람은 각각 오가야에 봉했다. 수로는 금합에서 태어났다. 하여 성은 金으로 여섯 사람 가운데  제일 먼저 나왔다 하여 이름을 수로라 하였다. 그는 뒤에 하야타국(인도의 일국)의 공주인 허황옥(성은 허  이름은 황옥)을 비로 맞아 10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인 거동은 수로왕의  후사로 삼았고 허씨부인(수로왕비)의 부탁으로 허씨 성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거등의 아우인 두 아들에게는 모후의 성인 허성을 주었다. 이때부터 허씨성이 세상에 전해짐으로써  오늘날 허씨의 근원이 된 것이다. 그리고 김해김씨 본관의 연혁을 보면 가락의 고도는 곧 지금의 경남김해이다.  오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지명도 여러 가지로 변했으나 가락국을 금관국으로 또는 금관군 금관소경 임해현 김주 김녕부 김주목 등으로 여러 차례 고쳐 부려오다가 고려 충선왕 때에 이르러 김해부가 설치됨으로써 가락왕(수로)의 후손들은 본관을  김해로 하게 된 것이다. 후손들이 남달리 번창 함에 따라 금령군파를 비롯하여  142개 파로 분파하여 그 계대를 계승하고  있다. 그 가운데 목경계의 경4(영견, 영서, 영정, 영순)가 제일  많은 수를 점하고 있으며 목경의 아우되는 익경계의 4군파(극조, , 여수 세기)와 관계의 3현파(극일, 일손, 대유)  주류를 이루고 있다.

 

<행 렬 자>

 

(금령군<목경>)

20(顯현) 21(培배) 22(錫석 鍾종) 23(洙수 泰태) 24(榮영) 25(謙겸 燮섭) 26(載재 在재) 27(鎭진) 28(浩호) 29(根근) 30(炳병 性성) 31(坤곤 用용)  32(鎬호) 33(淳순) 34(東동) 35(烈열 煥환) 36(重중) 37(善선 鎔용) 38(洛락) 39(相상) 40(炯형) 41(奎규 基기)

 

(감무공<익경>)

19(相상) 20(炫현) 21(墉용 在재) 22(鎬호) 23(永영) 24(植식) 25(炯형) 26(奎규)  27(鎔용) 28(淳순) 29(東동) 30(勳훈) 31(重중)  32(會회) 33(源원) 34(柱주)  35(燦찬) 36(基기) 37(鍾종) 38(燮섭)

 

(판도 판서공())

21(溶용) 22(坤곤) 23(鎭진 鍾종) 24(泰태 洙수) 25(東동 相상) 26(熙희  煥환) 27(奎규 基기) 28(錫석 鎬호) 29(洛락 永영) 30(柱주 植식) 31(熹희) 32(壎훈 在재)  33(善선 錡기) 34(洪홍) 35(東동) 36(夏하)

 

(문경공<>)

20(寬관 煥환) 21(永영 喜희) 22(棋기 鉉현) 23(熙희  漢한) 24(載재 植식) 25(鏞용 炅경) 26(泰태 坤곤) 27(來래 鉦정) 28(燮섭 洪홍) 29(奎규 秉병) 30(鍊련 勳훈) 31(洪홍 圭규)

 

(부사공())

17(鎰일) 18(澤택 洙수) 19(東동 相상) 20(炯형 燮섭) 21(均균 奎규) 22(鍾종) 23(洛락) 24(相상) 25(烈열) 26(載재) 27(鉉현)

 

(충정공())

20(梓자) 21(炫현) 22(性성) 23(錫석) 24(浩호) 25(柱주)

 

(도총관공(경신))

21(履이) 22(燮섭) 23(堯요) 24(鍊련) 25(漢한) 26(錫석) 27(海해) 28(孝효) 29(忠충) 30(東동) 31(龍용)

 

(판서공(불비))

20(洙수) 21(秉병) 22(燮섭) 23(圭규) 24(鎭진) 25(浩호) 26(榮영) 27(炯형) 28(載재) 29(鎬호) 30(洪홍) 31(權권) 32(熙희) 33(柱주)

 

(판도판서(첨험))

21(永영) 22(柱주) 23(炳병) 24(圭규) 25(錫석) 26(洙수) 27(東동) 28(燮섭) 29(基기) 30(鍾종)

 

(부정공())

19(淵연 泰태) 20(榮영 秉병) 21(燮섭 煜욱) 22(圭규  吉길) 23(鍾종 鎔용) 24(泰태 永영) 25(相상) 26(炳뱡) 27(均균)

 

(사서공(이형))

1(炳병) 2(圭규) 3(錫석) 4(湜제) 5(東동) 6(烈열) 7(孝효) 8(鎭진) 9(泳영) 10(樂락)  11(南남) 12(基기)

 

(율은공 ())

18(相상 柄병) 19(斗두) 20(基기 時시) 21(善선  鍾종) 22(浩호 淳순) 23(榮영 根근) 24(煥환 燮섭) 25(載재 圭규) 26(德덕 鉉현) 27(求구 洛락)  28(植식 東동) 29(熙희 勳훈) 30(若약 堯요) 31(鍵건 鎭진) 32(洙수 大대) 33(樂락 柱주) 34(煥환) 35(均균 用용) 36(欽흠 錫석) 37(

) 38(杰걸 模모) 39(烈열 煜욱) 40(聖성 坤곤) 41(承승 鍍도)

 

(참봉공(인서))

20(泳영) 21(東동) 22(熹희) 23(圭규) 24(錫석) 25(源원)

 

(승사랑공(지서))

18(致치) 19(錫석) 20(永영) 21(秉병) 22(煥환) 23(在재)

 

(부호군공(거공))

16(泳영 洛락) 17(柄병 相상) 18(燮섭 烈열) 19(圭규  在재) 20(錫석 鉉현) 21(源원 泰태) 22(榮영 植식) 23(炯형 顯현) 24(埰채 培배)

 

(판결사공(용만))

10(鍊련) 11(淙종) 12(植식) 13(炳병) 14(珉민 基기)  15(洙수 浩호) 16(相상) 17(熙희) 18(圭규)

 

(운은공(대진))

12(澤택) 13(柄병) 14(烈열 煥환) 15(圭규) 16(鍾종) 17(永영) 18(杓표) 19(熙희)  20(海해) 21(東동) 22(炫현 燮섭) 23(在재)

 

(진사공())

12(基기) 13(鉉현) 14(濟제) 15(植식  柱주) 16(煥환) 17(均균 坤곤)  18(鍾종 鎭진) 19(洛락) 20(秉병) 21(炯형)

 

(대제학공(득하))

16(斗두) 17(煥환) 18(鎭진) 19(永영) 20(根근) 21(熙희) 22(基기) 23(錫석) 24(海해)

 

(부호근공(천익))

12(賢현) 13(載재 榮영) 14(圭규) 15(銖수) 16(泓홍) 17(林임) 18(炳병) 19(基기)  20(錫석) 21(河하) 22(相상 東동) 23(熙희 燮섭) 24(在재 均균) 25(鎔용 鍾종) 26(泰태 浩호) 27(根근 模모) 28(永영 灝호) 29(坤곤 培배) 30(鎭진 鎬호) 31(洛락)

 

(문천공(귀존))

14(鍊련 淵연) 15(泰태) 16(榮영 根근) 17(熙희)  18(圭규) 19(鎭진) 20(浩호) 21(東동) 22(烈열) 23(在재) 24(鍾종) 25(洙수)

 

(유수공())

15(在재) 16(廷정)

 

(충순위공(극제))

9(在재) 10(鎭진) 11(永영) 12(植식) 13(炯형) 14(圭규)  15(鎔용) 16(淳순) 17(東동) 18(煥환) 19(用용) 20(鎬호) 21(泰태) 22(根근) 23(炫현) 24(均균) 25(鍊련) 26(洙수) 27(柄병) 28(烈열)

 

(통정공(창수))

14(鍾종) 15(泰태) 16(榮영) 17(燮섭) 18(在재) 19(鎭진) 20(浩호) 21(根근) 22(性성) 23(用용)

 

(판서공(진업))

8(濟제) 9(植식) 10(顯현) 11(培배)  12(鍾종) 13(泰태) 14(榮영)  15(燮섭) 16(在재) 17(鎭진) 18(浩호) 19(根근)

 

(통사랑공(여구))

13(植식) 14(顯현) 15(培배) 16(鍾종) 17(泰태) 18(榮영) 19(燮섭) 20(在재) 21(鎭진) 22(浩호) 23(根근) 24(益익)

 

(문헌공())

17(奎규) 18(勳훈) 19(基기) 20(鎭진) 21(洛락) 22(東동) 23(容용) 24(在재) 25(商상) 26(泰태) 27(杓표) 28(炯형) 29(培배) 30(兌태) 31(永영) 32(秉병)

 

(생원공(현중))

15(培배) 16(鍾종) 17(泰태) 18(榮영) 19(燮섭) 20(載재) 21(鎭진) 22(浩호)

 

(판전공(명택))

16(鎭진 章장) 17(周주 柱주)  18(致치 炳병) 19(祚조) 20(鍾종)  21(泰태) 22(相상) 23(烈열) 24(圭규) 25(鎔용) 26(海해) 27(植식) 28(炳병) 29(埈준) 30(鉉현) 31(洛락)

 

(숭정공(종정))

11(律윤) 12(基기) 13(鎬호) 14(永영) 15(柱주)

 

(참의공(진시))

9(植식) 10(顯현) 11(培배) 12(鍾종) 13(泰태) 14(榮영)  15(燮섭) 16(在재) 17(鎭진) 18(浩호) 19(根근) 20(性성)

 

(수성백공())

9(植식) 10(顯현) 11(培배) 12(鍾종) 13(泰태)  14(榮영) 15(燮섭) 16(在재) 17(鎭진 錫석) 18(浩호 永영) 19(根근 東동) 20(炯형)

 

(학생공(락서))

7(元원) 8(塡진) 9(鈺옥) 10() 11(柱주) 12(炳병) 13(均균) 14( ) 15(洽흡) 16(東동)

 

(부호군공(우유))

6(植식) 7(顯현) 8(培배) 9(鍾종) 10(泰태) 11(榮영) 12(謙겸)  13(在재) 14(鎭진) 15(浩호) 16(根근) 17(炳병)

 

(좌정승공(만희))

1(顯현 熙희) 2(培배) 3(鎭진 鍾종) 4(澤택 海해) 5(根근 柱주) 6(炫현 勳훈) 7(在재  圭규) 8(鎬호 銓전) 9(淳순 潤윤) 10(杓표 模모) 11(炯형  炅경) 12(均균 根근) 13(錫석 鏞용) 14(瀅형 淡담) 15(東동 柱주)

 

金海金氏(김해김씨)

 

시조 김충선은 본래 일본인으로 본  성명은 사야가이다. 그는 1592(선조25) 임진왜란때 가등청정의 좌선봉장으로 우리나라 침공에 앞장서 나왔다. 그러나 그는 조선의 문물을 흠모한 나머지 경상도 병마절도와 박진에게 귀화하였다. 기화후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때 전공을 세우고 자헌대부에 올랐으며 권율장군의 진청으로 성명을 하사받아 김충선이 되고 김해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金化金氏(금화김씨)

 

시조 金景言(김경언)의 선세계는 신라 종실의 후예이며 그가 평장사로 금화군에 봉하여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을 금화로 하였다. 시호는 충장이다.

 

<행 렬 자>

65(益익) 66(義의) 67(應응) 68(榮영) 69(重중)

 

羅州金氏(나주김씨)

 

시조 金雲發(김운발)은 신라 56대 경순왕의 손자이다. 그는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고 나주군에 봉해짐으로써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나주로 하게 된 것이다. 묘소는 개성시 북쪽 오룡산에 있다.

 

<행 렬 자>

33(基기 用용) 34(鐸탁 九구) 35(禹우 昞병) 36(衡형  宇우) 37(晟성 載재) 38(起기 熙희) 39(秉병 度도) 40(彰창 宰재) 41(致치 程정) 42(模모 昊호)

 

樂安金氏(낙안김씨)

 

락안김씨는 신라 경순왕 김부(金傅)의 제3자 명종계에서 분적한 계통이다. 명종의  11세손 영고의 제2자 수징(락선당)이 고려 명종때 감무로 있으면서 국난을 평정한 공으로 락안군에 봉해졌으므로 경주김씨에서 분적 본관을 락안으로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묘소는 실전되고 전북 고창군 성내면 당덕리 암동에 락흥단을 설단하고 매년 음213일에 제사 지낸다.

 

<행 렬 자>

26(永영 準준) 27(植식 楨정) 28(炳병 煌황) 29(基기  培배) 30(鍾종 鎭진) 31(洙수 沅원) 32(東동 權권) 33(烈열 煥환) 34(圭규 載재) 35(鉉현 鈺옥) 36(浩호 源원) 37(相상 杓표)

 

南陽金氏(남양김씨)

 

시조 金 (김적)의 선세계는 가락국 김수로 왕의 후예이라고 한다. 그는 고려 의종때 나라에 변란이 있을 것을 미리 알고 일가가 남양 산곡에 이사하여 정착 세거 하였다. 그래서 계대가 실전되었고 그의 후손으로 약해가 조선 태조를 도와 공을 세워 남양백이 되었다. 그의

아들인 김계는 1436(세종)에 출생  성종때 성균진사가 되었는데 무오사화로  인해 정주로 유배되었다. 그래서 그곳에 정착세거 하면서 후손들이 본관을 남양으로 했다. 묘소는 박천군 용계면 은봉리에 있다.

 

<행 렬 자>

16(鉉현 鎰일) 17(濬준 源원) 18(稷직) 19(燦찬  燾도) 20( 후 均균) 21(鍾종 鎭진) 22(河하 洛락) 23(相상 裁재) 24(薰훈 熙희) 25(基기 奎규)  26(錫석 鎬호) 27(潤윤 濟제) 28(杓표 植식) 29(炳병 文문) 30(圭규 培배) 31(鍊련 銖수)

 

藍浦金氏(람포김씨)

 

시조 金忠吉(김충길)의 선세계와 사적은  병화로 실전되어 미상하나 그의  증손 김성일은 1729(영조)에 문과에 급제하고 후손인 김봉서는  1741(영조)에 문과에 급제한 사족으로 후손들은 김충길을 시조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본관을 람포로 하고 있다. 평북 철산군 일원에 수십세대가 살고 있다.

 

棠岳(海南)金氏(당악해남김씨)

 

시조 金忍(김인)은 조선 태종때의  원종공신으로서 남병의 좌막으로 있으면서  나주 마산 구업리에 살았고 본관의 유래에 대해서는 미고이나 해남의 고로들의 전언에 의하면  고려말에 병부상서를 지낸 김모가 난을 피하여 해남으로 내려와 살았으므로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당악(해남)으로 살았다고 한다. 묘소 영암군 금정면 남산리 반지곡에 있고 매년 음321일에 향제한다.

 

<행 렬 자>

11(相상) 12(汝여) 13(命명) 14(禎정) 15(國국) 16(榮영) 17(圭규)  18(鎭진) 19(澤택) 20(東동 柱주) 21(炳병 煥환 炫현) 22(載재 基기 孝효)

 

唐岳金氏(당악김씨)

 

시조 金樂(김락)은 신라 46대 문성왕의 5세손으로 왕건을 도와 개국공신 2등이 되었다. 927(태조) 원보 재충과 함께 대량성(합천)을 쳐서 장군 허조등을  사로 잡았다. 이해 공산에서 견훤과 싸우다가 포위된 태조를 구하고 전사했다. 그 공으로 태주는 지묘사를 세워 명복을 빌고 당악군을 식읍으로 하사 하였다. 그래서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당악으로  하였다. 평남 대동 중화 평원군 일원과 평북 삭주군 일원에 수백호가 살고 있다.

 

大邱金氏(대구김씨)

 

시조 金達(김달) <관직 병조참의>은 신라 경순왕의 제 4자 김은설의 후손인 김방경의 제 4자 김론의 4세손이다. 김달은 원래 경북 대구 도화촌에 거주하였으나 1400(정조) 1월 제2차 왕자의 난때 함경도 길주에 유배되었다. 그 후손들이  배소를 따라 정착세거 함으로부터

개전의 세거지인 대구를 본관으로 삼았다. 그후 후손이 번창하여 함경도 명천  지방과 평안도 용천 의주등지에 거주하면서 많은 문무현신을 배출 하였다. 그러나 계대소목과 곤계관계를 상고할 수 없으므로 평안도에 거주한 계통은 浩堅(호견)을 입만중조(1)로 하여 세계한 것으로 본다. 이외에 대성을  1세조로 하여 계대하는 함경도계 분파가  있어 3파가 각각 계대하고 있다.

 

<행 렬 자>

15(弘홍 碩석) 16(時시 志지) 17(基기 應응) 18(湜제  濬준 會회) 19(尙상) 20(坤곤 一일) 21(聖성 道도)

 

 

德水金氏(덕수김씨)

 

시조 金泥(김니)는 부사를 역임했으며  그의 후손들이 덕수에 토착한  사족이어서 본관을 덕수라 하였다.

 

道康金氏(도강김씨)

 

도강김씨는 김알지의 35세손 김희조(도강백도성부원군) 1세조로 삼아 계대하고 있다 .시조 김희조는 호를 강성이라 하며  시호는 문효이다. 그는 고려때  문하시중으로 병부상서를 지내고 도성부원군이 되었다. 그러나 도강백을 수봉하였기에  그 후손들이 도강을 본관으로 삼았다. 고려 신종 기미(1199)에 죽었고 향사일은 음3월 상정일이다.

 

<행 렬 자>

23(士사 赫혁) 24(欽흠 錫석) 25(永영 泳영) 26(述술 柱주 柄병) 27(煥환 燮섭) 28(基기 奎규 在재 載재) 29(鎬호 鉉현 鍾종 鎭진) 30(洙수 濟제) 31(相상 植식 杓표 桓환) 32(熙희  炯형) 33(載재 坰경 均균) 34(鈺옥 鉉현) 35(漢한 泰태)

 

東萊金氏(동래김씨)

 

시조 金興濤(김흥도)는 조선 중종때  동래 부사로 재직중  기모사화(1519)에 화를 입고 안변 지방에 이사하여 은거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후손들이 시조가 재임하였던 동래를 본관으로 삼았다.

 

<행 렬 자>

10(宗종) 11(彦언) 12(安안) 13(鳳봉) 14(性성) 15(鍾종) 16(翰한 澈철) 17(集집 采채)

 

登州金氏(등주김씨)

 

시조 金長生(김장생)은 중국 명나라 한림학사로 래조하여 동주(안변)에 세거하니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등주로 하였다.

 

<행 렬 자>

18(炳병) 19(奎규) 20(鍾종) 21(源원) 22(東동) 23(炫현) 24(在재) 25(錫석) 26(泳영) 27(根근)

 

茂長金氏(무장김씨)

 

무장김씨는 선계를 달리하는 두 계통이 있다. 그중 하나는  가락국 수로왕의 원손인 金璇(김선)이 고려때 충훈한 공으로 장사군에 봉해졌으며 1375  공민왕이 죽은후 관직을 버리고 장사로 낙향 세거하니 후손들이 본관을 무장이라고 하였다하며 또 다른 계통의 김알지의 후예로 선대의 유적이 상실되어 상계를 밝히지 못함으로 제주 목사를 지낸 김자무를 1세조로 하여 계대하고 있다. 그는 사육신 박팽년의 사위로 장인의 피화에 연류하여 황해도 장단에 은거하면서 본관을 무장으로 하였다.

 

<행 렬 자>

17(釘정) 18(淇기) 19(楨정) 20(炯형) 21(在재) 22(鎔용) 23(永영) 24(東동) 25(熙희) 26(圻기) 27(銖수) 28(汶문) 29(柱주) 30(薰훈) 31(址지)

 

文化金氏(문화김씨)

 

시조 金檢達(김검달)은 경주김씨의 후예이나 선세계의 문적이  병화로 실전되어 분파계대가 미상이며 유주(문화의 고호)에 세거하여 후손들은 그를 중조  1세로 세계를 계승하고 본관을 문화라하고 있다.

 

<행 렬 자>

19(星성) 20(大대) 21(傑걸) 22(炳병) 23(壎훈) 24(鍾종) 25(洙수)

 

密陽金氏(밀양김씨)

 

시조 金承祖(김승조) <:홍의제, 관직:사직)  신라 겨순왕의 4째아들인  은설(대안군) 13세손이다. 그는 고려조에서 1272(원종13) 김방경의 막하장이 되어 삼별초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고 밀성(밀양의 고호)군에 봉해짐으로써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밀양으로 하

게된 것이다. 묘소는 경기도 개성시 용산동에 있으며 매년 320일 송정사에서 제향.

 

<행 렬 자>

23(在재) 24(錫석) 25(洪홍) 26(植식) 27(燦찬) 28(培배) 29(基기) 30(錫석) 31(永영) 32(東동) 33(烈열) 34(基기) 35(鈺옥) 36(洙수) 37(根근) 38(炯형) 39(遠원) 40(圭규)

 

白川金氏(백천김씨)

 

시조 金善(김선)은 신라 대보대왕 김알지의 후예이다. 그는 조선 성종때 전라좌수사로 있으면서 화를 입어 1476(성종7) 의주로 유배되었다. 그의 gths들이 백천으로 이주 세거하면서 안악김씨에서 분적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백천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매년 음99일에 향사한다.

 

<행 렬 자>

15(珠주) 16(采채) 17(用용) 18(瑞서) 19(麟린) 20(祚조) 21(炳병) 22(國국)

 

保寧金氏(보령김씨)

 

시조 金億積(김억적)은 병조정랑을 역임했으며 보령에 세거한  사족으로 후손들이 본관을 보령으로 하여 세계를 계대하고 있다.

 

扶安金氏(부안김씨)

 

부안김씨는 경순왕()의 태자 일()이 국운이 쇠퇴하자 처자를 거느리고 개골산(금강산)에 들어갔다가 5대손 경수에 이르러서 비로소 세상에 나와 고려 선종때 문과에 급제 이부상서까지 지냈으며 그의 아들 춘이 부안부원군에 봉해져 본관을 부안으로 하고 일을 시조 경

수를 1세조 구를 중조로 계대한다. 중조 구는 자를 차산호를 지표라 하고 시호는  문정이다. 1211(희종7)에 출생 1278(충렬왕4)에 죽었다.  향사일은 음101일 묘소는  전북 부안군 산내면 운산리 지지표에 있다.

 

<행 렬 자>

27(洛락) 28(述술) 29(炯형) 30(喆철) 31(鍾종) 32(源원) 33(秉병) 34(性성) 35(在재) 36(銖수) 37(淳순) 38(根근)

 

泗川金氏(사천김씨)

 

안동김씨에서 분파했다. 시조 金阜(김부)는 고려 공양왕때 사람으로 자는 유돈 시호는 정의이다. 정란 공신으로 사성(사천별호) 부원군에 봉해져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사천으로 하였다.

 

<행 렬 자>

15(洙수) 16(桓환) 17(烈열) 18(載재) 19(欽흠) 20(洛락) 21(植식) 22(暎영) 23(瑄선) 24(鎬호) 25(漢한) 26(東동) 27(熙희) 28(圭규) 29(鎭진) 30(淙종) 31(杓표) 32(炳병) 33(均균) 34(鐸탁)

 

三陟金氏(삼척김씨)

 

시조 金渭翁(김위옹)은 신라 경순왕의  8자인 추(일선군)의 아들이다.  그는 고려조에서 삼한벽상공신으로 벼슬이 검교사농겸어사부상주국 좌승상에 이르고 실직(삼척)  군왕에 봉해졌다. 그래서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삼척으로 하게되었다. 시조의 묘소는 삼척군 삼척읍  성내리갈야산에 있으며 향사일은 음 3 25일이다.

 

<행 렬 자>

26(興흥) 27(鎬호 鐄횡) 28(  淑숙) 29(榮영 植식)  30(炯형) 31(壽수 基기) 32(鎭진  鍊련) 33(泰태) 34(東동 根근) 35(炫현 煥환) 36(在재  圭규) 37(鎔용 錫석) 38(洙수 洛락)  39( ) 40(炳병 熙희) 41(赫혁 喆철) 42(鍾종 鈺옥) 43(淳순  澤택) 44(相상 桂계) 45(魯노 烈열) 46(善선 重중) 47(錄록 鎰일) 48(永영 漢한) 49(桓환 來래) 50(然연 南남) 51(埈준 均균) 52(鏡경 鉦정) 53(求구 溶용)

 

商山金氏(상산김씨)

 

시조 김수(金需)는 신라종실(알지계)의 후예로서 고려의  보윤으로 벼슬이 시중에 이르렀으나 그 선계를 고증할 수 없어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였으며 누대 상주(상산)에 세거하였고 5세비궁이 상산부원군 9세 일이 상락(상주) 10세록이  상성군에 봉해져 보관을 상산으로 하였다. 후손들은 경북 상주읍 신봉리 구월산에 시조의 단을  설치 제를 세워 매년 음럭315일에 향사하고 있다. 그리고 고려조에 보문각제학을 지낸  김조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상산으로 하는 씨족이 있는데 김조의 딸이 김수의 9세손 일(상락군)의 처였다고 하니 김수계와는 동본동성이면서 완전한 이족인 것이다. 또 김수계의 선치(락성군파조)의 후손 김효련을 1세조로 하는 파가 있다.

 

<행 렬 자>

(김 수 계)

27(容용) 28(起기) 29(鎬호) 30(源원) 31(相상 秉병) 32(熙희) 33(均균) 34(鎭진)  35(淳순) 36(根근) 37(燮섭) 38(壽수) 39(鎔용)  40(漢한) 41(炳병) 42(默묵)  43(在재) 44(鉉현) 45(永영) 46(秀수)

 

(김효련계)

30(五오) 31(海해) 32(鶴학) 33(履이) 34(實실) 35(炳병) 36(星성) 37(俊준)

 

瑞興金氏(서흥김씨)

 

서흥김씨는 김알지의 34세손으로 고려조에 김오위정용중랑장을 지낸 김보를 시조로 한다. 그의 손자인 김천록은 일찍이 상장군으로서 일본정벌에  종군한 공으로 서흥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그의 후손들은 본관을 서흐응로 하였다.

 

<행 렬 자>

20(喧훤 繼계 世세 國국 韻운) 21(漢한 濟제 載재 坤곤 宗종 澤택) 22(範범 運운  德덕 權권 白백) 23(燮섭 奎규 修수) 24(坤곤 東동 熙희 昌창  基기) 25(錫석 熙희 基기) 26(洙수 埴식 炳병 洛락) 27(植식 兌태 衡형 鍾종  模모) 28(煥환 永영 鉉현 燦찬) 29(載재  秉병 沿연 均균) 30(鏞용 容용 鍾종) 31(淳순 在재 洙수) 32(模모 相상) 33(炯형 烈열)

 

善山(一善)金氏(선산일선김씨)

 

시조 金宣弓(김선궁)<시호:순층>은 김알지의 30세손이며 문성왕의  8세손이다.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상해를 입힌자의 목을 베고 처벌을 자청하여 투욱된후 조정에 의해 효자라고 석방되어 표창을 받았다. 그는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정벌 할 때 선산군에 이르러 모병하였는데 종군할 것을 희망하니 태조가 크게 기뻐하여 친히  어궁을 하사하고 선궁이라 사명했다.  그로부터 왕건을 도와 후삼국의 통일에 공을 세워 정란보국공산에 오르고 벼슬이  문하시중에 올랐으므로 그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일선으로 하엿는데 조선 태종때 일선이 선산으로 개칭됨에 따라 선산으로 개관했다.

 

善山金氏(선산김씨)

 

시조 金錘(김추)는 김알지의 28세손 경순왕부의 제8자이다. 그는 고려태조의 왼손으로  고려조에서 일선(선산의 고호)군에 봉해졌으므로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선산으로 하였다.

 

<행 렬 자>

17(遠원 秉병) 18(東동 容용) 19(默묵 載재) 20(敎교  鎬호) 21(祚조 承승) 22(思사 集집) 23(九구) 24(雨우) 25(寧녕) 26(誠성) 27(記기) 28(宰재)

 

雪城金氏(설성김씨)

 

시조 金之宣(김지선)은 신라 경순왕의 제 5자 김석의 혈손이다. 그는 의성김씨에서 분적한 개성김씨 시조 용주의 증손으로서 설성에 세거하면서 고려때 보문각 대제학을 지내고  가세가 크게 번창 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1)로 하고 개성김씨에서 분적본관을 설성으로 하여 계대하고 있다.

 

<행 렬 자>

21(鍾종) 22(泰태) 23(東동) 24(熙희) 25(周주) 26(鎔용) 27(淵연) 28(秉병) 29(烈열) 30(孝효) 31(鎬호) 32(濟제) 33(植식) 34(炯형) 35(基기) 36(鏞용) 37(洙수) 38(榮영) 39(勳훈) 40(瑞서) 41(鉉현) 42(洛락) 43(權권) 44(燦찬) 45(培배) 46(鎭진) 47(淳순) 48(相상)

 

遂安金氏(수안김씨)

 

시조 金 (김선)은 경순왕 부의 4자 대안군(은설) 8세손 방경(상락군)의 장자이다. 고려조에 원충단력안사보정공신으로 벼슬이 부지밀직사사, 전법판서, 상장군에 이르고  수안군에 봉해져서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수안으로 하게 되었다.

 

<행 렬 자>

21(壽수 圭규) 22(鉉현 鎔용) 23(洛락 淳순) 24(穆목  東동) 25(在재 址지) 26(炯형 烋휴) 27(鎭진 錫석)

 

水原金氏(수원김씨)

 

시조 稟言(품언)은 고려 현종때 충순적덕정란공신으로서 은자광록대부문하시랑평장사태자소보를 지냇으며 계단을 통평한 공에 의해 수성군에 봉해지고  식읍을 하사 받았다. 그래서 후손들이 수성(수원)에 세거하면서 본관을 수원으로 한 것이다.

 

<행 렬 자>

61(揆규) 62(根근) 63(忠충) 64(成성) 65(康강) 66(求구) 67(秉병) 68(燮섭) 69(中중) 70(欽흠) 71(雨우) 72(東동) 73(光광) 74(圭규) 75(鎭진) 76(承승) 77(相상) 78(大대) 79(敎교) 80(鎬호) 81(潤윤)

 

順天金氏(순천김씨)

 

시조 金摠(김총)은 신라 종실의 후예이다. 그는 헌안왕때 인가별감으로 많은 공을 세워 평양(순천의 고호)군에 봉해짐으로써 그 후손들이 본관을 순천으로 하게된 것이다. 시조의 묘소는 전남 승주군 주암면 장촌에 있고 매년 101일에 향사한다.

 

<행 렬 자>

30(碩석) 31(興흥) 32(龜구) 33(俊준) 34(錫석) 35(敏민) 36(禧희) 37(章장) 38(祐우) 39(翼익) 40(鎭진) 41(源원) 42(相상)

 

信川金氏(신천김씨)

 

시조 金得秋(김득추)의 선계는 신라 종성이다. 그가 황해도 신천으로 옮겨 북거하면서 가세가 번성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1세조로하여 본관을 신천으로 하였다.

 

<행 렬 자>

54(漢한) 55(泌필) 56(承승) 57(鳳봉) 58(鉉현) 59(仁인) 60(明명)

 

安東金氏()(안동김씨())

 

안동김씨()는 대보대왕 김알지의 28세손 경순왕(김부)의 손자인 김숙승(평장사을 시조로 하고 있으며 또한 고려조의 명장으로서 삼별초와 왜구 등을 섬멸하여 정란정국공신으로  벼슬이 도첨의 중찬, 판전리사사, 도원수에 이르고 상락군 개국공에 봉해진 김방경을 중시조(1)로 하고 잇다. 그리고 시조를 전혀 달리하면서도  본관을 안동으로 하는 김씨가 있기 때문에 서로 혼잡을 피하기 위하여 본관을 구안동과 신안동으로 각각 판별하고 있다.

 

<행 렬 자>

21(源원) 22(榮영) 23(默묵) 24(在재) 25(會회) 26(泰태) 27(植식) 28(容용) 29(敎교) 30(鍾종) 31(雨우) 32(秉병) 33(熙희) 34(基기) 35(鉉현) 36(洙수)

 

安東金氏()(안동김씨())

 

시조 金宣平(김선평)은 신라말에 고창(안동의 고호)  성주로서 후백제의 견훤을 격파한 후 고려 태조 왕건에게 귀부하여 개국공신이되고 벼슬이 대광태사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그의 후손들으 본관을 안동으로 하였으며 이조  증기에 도정을 지낸 김극효를 증시조로  하고 있다. 그리고 혈연계보와 상계를 상고할 수 없는 지철파, 원수파, 열파 등 3파가 있다.  안동 김씨는 본관이 같으면서도 시조를 달리하는 두 계통이 있으므로 신안동, 구안동으로 구별한다.

 

<행 렬 자>

22(淳순) 23(根근) 24(炳병) 25(圭규) 26(鎭진) 27(漢한) 28(東동) 29(顯현) 30(年년) 31(鎰일) 32(求구) 33(模모) 34(然연) 35(培배) 36(銑선) 37(源원) 38(榮영) 39(思사) 40(埈준) 41(善선) 42(澤택) 43(植식) 44(煥환) 45(喆철)

 

安老金氏(안로김씨)

 

시조 金之敬(김지경)은 경순왕의  후손이나 상세계가  실전되었으나 누대 안로(나주속현) 지방에 세거한 사족이다. 그의 원손인  김득장은 호장을 지냈으며 아들  김극순은 대장군을 역임했다. 일선에는 경순왕의 손자 운발(나주김씨 시조)의 후예 또는 후장중윤 우발의 아들

이라고도 한다.

 

安山金氏(안산김씨)

 

시조 金肯弼(김긍필)은 신라 종실의 후예이며 아들 온부는  고려 성종때 추충수절창국 공신으로 개부의동삼사수사공상주국에 이르러 안산객구에 봉해졌으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상고 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후손인 위를 1세조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으며 위의 증손

인 정경은 조선조에 태조, 정종, 태종, 세종 4조에 걸쳐 벼슬하엿고 추충분의익재좌명공신으로 연성(안산고호)군에 봉해짐으로써 그의 후손들은  본관을 안산으로 하게된 것이다. 시조 긍필의 묘소는 경기도 시흥군에 있다.

 

<행 렬 자>

17(源원) 18(樂락) 19(燮섭) 20(基기) 21(鎭진) 22(濟제) 23(采채) 24(應응) 25(在재) 26(義의) 27(泰태) 28(裁재)

 

安城金氏(안성김씨)

 

득관조 김재영은 신라 종실의 후예로 진덕여왕때 백제와의 싸움에서 공을 세워  안성군에 봉작되니 신하에게 군을 봉하는 법으로는 처음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고종때에 이르러 시조 김돈을 기일세로  계대하게 되었다. 김돈은 안성군의 후예로 안성현에서 출생 고려  고종때에 문과에 급제 예부시랑, 한림학사,  김자광록대부 상서좌복사를 역임하였다.

 

<행 렬 자>

21(淳순) 22(相상) 23(炯형) 24(基기) 25(善선) 26(永영) 27(根근) 28(炳병) 29(在재) 30(鍾종) 31(潤윤) 32(東동) 33(熙희) 34(敎교) 35(錫석) 36(泰태) 37(植식) 38(然연) 39(圭규) 40(銓전)

 

安岳金氏(안악김씨)

 

시조 金瑩(김영)은 경주김씨 시조 김은설의 후손이다. 그는 단종조에 봉사직장으로 있으면서 단종을 영월로 호종하고 권신들의 참소로 강화에 유배되었다.  그후 성종때 신원되고 안악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안악으로 하여 계대하고 있다.

 

<행 렬 자>

62(()) 63(()) 64(()) 65(())  66(()) 67(()) 68(())  69(()) 70(()) 71(())

 

野城金氏(야성김씨)

 

시조 金就 (김취린)의 선세계는  신라 경순왕의 4  은설(대안군) 14세손으로서 그는 고려조에 호장중윤으로 계단이 침범했을 때 격퇴한 공으로 시중시랑이 되고 야성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야성(영덕)이라 하였다.

 

<행 렬 자>

27(之지) 28(浩호) 29(東동) 30(熙희) 31(在재) 32(鎭진)

 

楊根金氏(양근김씨)

 

김알지의 43세손인 시조 金仁贊(김인찬)의자는 의지, 호는 의암, 시호는 충민이다.  이태조를 도와 계층분의좌명 일등공신 대광보국승록대부의 정부좌찬성으로 익화군에 봉해지고  양근을 식읍으로 받음으로써 후손들이 김령김씨에서  분적 그를 1세조로 하고 본관을  양근이라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행 렬 자>

17(泳영) 18(秉병) 19(烈열) 20(在재 珍진) 21(鍾종 錫석) 22(洪홍 永영) 23(植식 樂락) 24(容용 然연) 25(圭규 埰채) 26(會회 鉉현) 27(源원  漢한) 28(東동 桂계) 29(燮섭 丙병) 30(基기 敎교) 31(鎭진) 32(海해)

 

梁山金氏(양산김씨)

 

시조 金衍(김연)은 고려때 통사사인을 지냈으며 본관의 유래는 미고이다. 다만 그의 손자 김맹을 고려사열전에는 양주 의춘현인이니 조는  연인데 평양에 도거하였다고 하였으니  이 기록으로 보아서 시조부터 양산을 본관으로 사용한 것이다.

 

<행 렬 자>

16(斗두) 17(淳순) 18(權권) 19(煥환) 20(在재 喆철)

 

楊州金氏(양주김씨)

 

시조 金元寶(김원보)는 경순왕 부의 제4자 은설(대아군) 9세손으로 고려 고종때 예부상서영돈령판추밀부사로 양주백에 봉해졌으므로 그 후손들이 본관을 양주로 하게 되었다. 7세손 남걸(호조판서)이 황해도 서흐흥로 낙향  이거하였는데 그의 부인 지식을  1세로 하는

평양파와 양주백의 8세손 견을 중시조로 계대하는 개천파로 대종을 이루고 있다.

 

<행 렬 자>

17(鼎정 永영) 18(國국 埰채) 19(埈준 炯형) 20(正정 均균)

 

彦陽金氏(언양김씨)

 

시조 金鐥(김선)은 대보공 김알지의 28세손 경순왕 부의 제7자이다. 그의 7세손인 就礪(취려)가 고려 고종때 계단군의 침입을 격퇴하고 한순, 다지 등의 반란을 평정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워 수태위, 중서시랑평장사, 판이부사에 이르러 언양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언양으로 한 것이다.

 

<행 렬 자>

22(甲갑) 23(九구) 24(昞병) 25(寧녕) 26(成성) 27(熙희) 28(康강) 29(宰재) 30(廷정) 31(揆규) 32(愚우) 33(元원) 34(會회) 35(殷은) 36(義의) 37(起기) 38(庸용) 39(新신) 40(奎규) 41(夏하)

 

延安金氏(연안김씨)

 

시조 金暹漢(김섬한)의 선계는 김알지으 후손으로  형제(미상)가 왕에게 직간하다가 형은 북빈경(강릉) 아우는 고염성(현연안)으로 각각 유배되었는데 섬한은 연안으로 간 아우의 후손이라고 전할뿐 혈연계보를 상고할 수 없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연안이라 하여 계대하고 있다. 묘소는 실전되고 경남 통영군 도산면 원산리에 설단 매년 10 13일에 향사한다.

 

<행 렬 자>

12(安안) 13(男남) 14(())  15(錫석) 16(()) 17(相상)  18(()) 19(載재) 20(()) 21(淵연) 22(秀수) 23(思사) 24(基기 燮섭) 25(鍾종 煥환) 26(泳영 持지) 27(柱주 銓전) 28(性성 濟제) 29(重중 植식) 30(鉉현 熙희) 31(源원  在재) 32(植식 鍵건) 33(憲헌 淳순) 34(圭규 東동) 35(鎭진) 36(澤택) 37(根근) 38(熙희) 39(培배) 40(均균) 41(澈철) 42(杓표) 43(恒항)

 

燕州金氏(연주김씨)

 

연주는 연기의 별호이며 시조 김준손은 경순왕의 아들 은설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턱의은 1454(단종2)생이며 자는 자언 호는 주헌이다.

1486(성종1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06 9월 중종 반정때 공이 있어 병충의결책익운정국공신 4등으로 연성군에 봉해졌으며 벼슬이 지중추에 이르렀다.

 

靈光金氏(영광김씨)

 

시조 金審言(김심언)(시호:문안)은 신라경순왕의  4째아들 은설의 4세손으로  고려 성종때 문과에 급제 현종때 예부상서내사시랑 평장사를 역임하고 오성군에 봉해져 본관을 영광으로 하여 아들 윤보 손자 극검으로 세계를 이어 오다가 누차의 병화로 문헌이 실전되어 소목계통을 밝히지 못하고 후손 정부(경파) (영광파) 태용(장흥파) 효민(무장파) 광찬(양사파) 교경(강계파) 중보(용강파) 연수(용강서정파)를 각각 파조(1)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행 렬 자>

18(綱강 必필) 19(尙상 重중) 20(昌창 錫석) 21(曄엽 浩호) 22(基기 秀수) 23(鎭진 煥환)

 

永山(永同)金氏(영산영동김씨)

 

시조 金令貽(김령이)는 신라 31대왕인 신무왕의 후예이다. 그는 고려조에서 전객사령을 지내고 뒤에 추충동덕보사공신으로 검교도첨의 찬성사에 추증 영산군에 추봉되어있으며  아들 김길원은 공민왕때 판도판서에 이르렀다. 특해홍건적을 토평한  공으로 영산 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그의 후손들은 본관을 영산으로 하게된 것이다. 시조의 묘소는 충북 영동군 남기산에 있다.

 

<행 렬 자>

24(洛락) 25(相상) 26(應응) 27(均균) 28(商상) 29(承승) 30(榮영) 31(熙희) 32(敎교) 33(善선) 34(泳영) 35(植식) 36(熏훈) 37(墩돈) 38(欽흠)

 

靈山金氏(영산김씨)

 

영산은 현재 경남 창령군 속면이다. 시조 김순은 경순왕의  아들 은설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석아요 시호는 희헌이다. 1432(세종14)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다. <국조방목>에 시조 김순의 보관이 의성으로 되어 있는 것을보면 아마도 그 후손들이 의성 김씨에서 분적 그를 시조로 하여 본관을 영산으로 한 것 같다.

 

靈巖金氏(영암김씨)

 

시조 金淑(김숙)은 고려 명종때에 호남염찰사로 영암에 침입한 왜적을 토평하는데 유공하여 영암군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본관을 영암으로 하였다.

 

<행 렬 자>

20(鉉현) 21(宗종) 22(珩형) 23(履이) 24(鎰일) 25(永영) 26(權권) 27(光광)

 

英陽金氏(영양김씨)

 

영양김씨의 원조 金忠(김충)은 중국 봉양부여남 출신으로서 당조에서 형주자사겸안염사를 지냈는데 당의 외교관으로 일본에 가다가 심한 풍랑을  만나 신라 유린지(금축산)에 표착되었다. 신라 경덕왕이 이를 알고 영양을 식읍으로 하사하고  남시로 사성하였으며 사후에 영의라 사시하였으니 일신양성이 되었다. 그러나 충의 장자 석중은 구성 김을 쓰게 되었고 영양에 정착세거 하면서 김씨의 혈통을 이어 왔다. 그후 누대가 실전되어 계대를 밝히지 못함으로 그를 원조로 후손 충황(첨의참리, 상호군)을 시조로 하고 본관을 영양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행 렬 자>

22(聲성) 23(在재) 24(鉉현) 25(永영) 26(植식 述술) 27(炳병) 28(瓚찬) 29(鎰일)  30(洛락) 31(東동) 32(思사) 33(載재)

 

寧越金氏(영월김씨)

 

시조 金麗生(김려생)은 신라 경순왕의 제 8자추의 후손이다. 그에 대한 연대와 사적은 실전되어 상고 할 수 없고 다만 전옥서 봉사를 지내면서 화를 입어 영월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거하였다고 전할뿐이다.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소목을 밝히지  못하고 후손 복중이 명천으로 이사하여 살면서부터 기1세하고 본관을 조상의 세거지인 영월로 하였다.

 

<행 렬 지>

11(時시) 12(常상) 13(八팔) 14(斗두) 15(允윤) 16(銀은 河하 京경) 17(應응 龍용 瑢용)

 

永川金氏(영천김씨)

 

영천김씨는 본관을 같이 하면서도 상계의 소목을  밝힐 수 없어 1세조를 달리하는  4파가 있다. 경순왕 부의 제 3자 명종의 17세손 철일을 1세조로  하는 파가 영천에 세거하다가 은에 이르며 평북 가산으로 이어가면서 조상의 세거지 였던 영천을 본관으로 하여 기 1세하는 파가 있고 경순왕의 후예인 지식을 1세조로 하는 파가  있다. 그리고 김알지의 후예로 검교 한성부윤을 지낸 영장을 11세조로 하는 파가 있는데 후손들이 영천에서 황해도 평산으로 파가 있는데 후손들이 영천에서 황해도 평산으로 이어가면서 조상의 세거지 였던 영천을 본관

으로 삼았던 것이다. 영장의 묘소는 황해도 평산군 남천읍 두무리에 있다.

 

<행 렬 자>

(김온계)

17(燉돈) 18(載재) 19(鏞용) 20(泳영) 21(幹간)

 

(김영장계)

11(坤곤) 12(應응) 13(周주) 14(根근) 15(炳병) 16(範범)

 

寧海金氏(영해김씨)

 

시조 金億敏(김억민)은 신라 경순왕의 4째아들 은설의 14세손이며  고려말에 중랑장을 지내고 조선개국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으로 안동군에 봉해진 김철의 손자이다. 그는 진사시에 합격한 후 병조정랑을 거쳐 영해부사를 역임함으로써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영해로  하게된 것이다. 묘소는 함경북도 학성군 학남면 금산동 동막촌 사을포산에 있다.

 

<행 렬 자>

12(英영 玉옥) 13(源원 恒항 權권) 14( 후 基기) 15(鏞용 龍용 弼필 錫석) 16(洪홍 成성  國국 福복) 17(根근 興흥) 18( ) 19(相상)

 

禮安金氏(예안김씨)

 

시조 金商(김상)은 고려조의 호장이며 예안에 세거한 사족으로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예안이라 하였다.

 

<행 렬 자>

29(默묵 杰걸 光광 必필) 30(基기  在재 中중 坤곤) 31(鍾종 九구  兌태 錘추) 32(求구 淵연 유 확) 33(根근 林임 模모 寅인) 34(炳병 薰훈 熙희 昌창) 35(均균 培배 載재 淳순) 36(錫석 鐸탁 銑선 鎰일) 37(河하 泰태 洛락  澤택) 38(柄병 桓환 柔유 樞추) 39(思사  時시 忠충 憲헌) 40(   상 堉육 塤훈)

 

烏川金氏(오천김씨)

 

시조 金 興(김서흥)은 경순왕의 제2자 황의 7세손으로 고려 인종때 문림랑 예빈승동정을 지내고 오천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4세손 예직이 고려 원종때 공을 세워 오천군에 봉해졌으므로 분적하여 본관을 오천이라 하여 계대를 계승하고 있다.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선거산에 있다.

 

<행 렬 자>

14(應응) 15(源원) 16(東동) 17(熙희) 18(在재) 19(銖수) 20(泳영) 21(植식) 22(烈열) 23(圭규)

 

龍宮金氏(용궁김씨)

 

시조 金存中(김존중)의 호는 지암, 시호는 정열이다. 고려 인종때  문명이 널리 알려져 태자시학이 되고 문과에 급제한후 첨사부록사가 되었다. 의종이 즉위한 뒤 기거주 보문각동제거를 거쳐태자소보에 이르러 용궁군에 봉해졌고 뒤에 수충내보동덕공신으로 이부상서  수문전태학사 정당문학에 추증되었다. 그래서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용궁으로 하였다.

 

<행 렬 자>

14(景경 基기 奎규) 15(萬만 鉉현)  16(尙상 雨우) 17(致치 東동) 18(世열  烈열) 19(宅택 孝효) 20(瑞서 鏞용) 21(永영 泰태) 22(植식  權권 來래) 23(炳병 烘홍 榮영) 24(基기  圭규 培배) 25(鎭진 鍾종 鉉현 錫석) 26(雨우 浩호 澤택) 27(東동 相상)

 

龍潭金氏(용담김씨)

 

시조 金順瑞(김순서)는 수원김씨의 시조 김품언의 제4자로 고려조에 예부랑을 지냈다.  그의 후손인 김덕생은 이태조의 원종공신으로 병조참의를 역임 그가 명천으로 낙향하여  세거하면서부터 후손들이 명천, 길주, 경성 등에 많이 정착 세거하였다.

 

<행 렬 자>

15(商상) 16(斗두) 17(植식) 18(昌창) 19(榮영) 20(鍾종)

 

牛峰金氏(우봉김씨)

 

중조 金 (김욱)은 신라 경순왕의 제3자 명종의 아들이다. 그는 고려 성종때 시어사로 군공을 세워 수지의후에 봉해지고 다시 우음(우봉의 고호)군에  봉해졌으므로 그 후손들이 본관을 우봉이라 하고 시조(득성조) 김알지의 중시조(분파조) 김명종 중조(관행조)욱으로 하여 계세하고 있다. 다른 일설에는 욱의 5세손 원길이 고려  원종때 도위로 공을 세워 우봉군에 봉해졌으므로 그를 관향조라고도 한다.

 

<행 렬 자>

62(相상) 63(炯형) 64(基기) 65(鎭진) 66(泰태) 67(杓표) 68(炅경) 69(埰채) 70(鍈영) 71(濟제)

 

蔚山金氏(울산김씨)

 

시조 김덕예는 신라 경순왕의 아들이다. 935년에 아버지인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투항하려 할 때 이를 극력 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처자를 버리고 마의태자를 따라 개골산에 들어갔다고도 하나 그의 행방에 대해 자세하지 않다.  그의 14세손인 환은 고려조에서 벼슬이 삼중대광영도첨의사에 이르고  학성(울산)군에 봉해짐으로서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울산으로 하게 되었다.

 

<행 렬 자>

32(煥환) 33(堯요) 34(中중) 35(洙수) 36(相상) 37(炳병) 38(裁재) 39(九구)

 

熊川金氏(웅천김씨)

 

신라말 견훤이 후고구려를 침벌하자 웅천김씨의 시조 웅 신백이  격퇴했다. 그 공으로 웅신(웅천)현을 식읍으로 하사받아 그 후손들이 그 곳에 세거하였다. 그러나 병화로 인해 선계에 대한 문헌이 소진되어 시조의 이름이 전하지 않고 있으며 다만 김중재의 기록만이 남아있어 그를 1세로 세계를 계승하여 본관을 웅천으로 삼았다. 그는 관직이 수의부위에 올랐으며 묘소는 개성 용수산에 있다.

 

<행 렬 자>

15(勳훈) 16(均균) 17(鍾종) 18(淳순) 19(林임) 20(烈열) 21(圭규)

 

原州(原城)金氏(원주원성김씨)

 

시조 金巨(김거)는 김알지의 37세손으로 그는  고려 의종때 이부상서를 거쳐  지추밀원사, 판삼사사, 지문하성사, 호부상서 등을 역임하고 원성(원주의 고호)백에 봉해짐으로서 후손들이 본관을 원주로하게 된 것이다.

 

<행 렬 자>

 

17(遇우) 18(鳳봉) 19(英영) 20(行행)  21(成성) 22(基기 起기) 23(鎬호  光광) 24(泳영 達달) 25(植식 鳳봉) 26(炳병 英영) 27(培배 行행) 28(鍾종 成성) 29(淵연) 30(相상) 31(燮섭) 32(重중)

 

月城金氏(월성김씨)

 

월성김씨는 경순왕의 후예로서 계대를 달리하는 두계통이  있다. 그중 한계통은 경순왕의 3자명종(영분공) 17세손인 이진을 1세조로하는  파가 있고 역시  경순왕의 4자 은설(대안군) 15세손인 광우를 1세조로  하여 계대를 이어왔는데  월성(경주의 고호)에서 세거하던 사족이었다. 그는 세종때 덕천군수로 있으면서 조정에  직간하다가 성천으로 유배되어 그곳에 세거하였는데 후손들이 조상의 록고지인 월성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행 렬 자>

 

46(灌관) 47(秀수) 48(希희) 49(世세) 50(應응) 51(諧해) 52(宇우) 53(是시) 54(汝여) 55(慶경) 56(萬만) 57(載재) 58(東동) 59(洪홍) 60(玟민) 61(河하) 62(濟제) 63(柱주) 64(炳병) 65(基기) 66(鎭진) 67(源원) 68(模모) 69(煥환) 70(圭규) 71(錫석) 72(淳순) 73(榮영)

 

殷栗金氏(은율김씨)

 

시조 金商銅(김상동)은 조선 명종때 사직으로  누차 시정을 간하다가 은율로 유배되었다. 사면이 되어 환경하는 도중에 해상의 풍랑으로 서북지방 정주로 표류되어 다시 출사하지 못하고 정주에 정착세거 하였으며 본관을 은율이라 하였다. 묘소는  평북 정주군 입표면 삼대산봉에 있다.

 

恩津金氏(은진김씨)

 

시조 김전개의 자는 백윤이요 아버지는 사원이다. 1553(명종8)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벼슬이 판관에 이르렀다. 평복 박천군 용계면 고창동에 36호가 살고 있다.

 

義城金氏(의성김씨)

 

의성김씨의 시조 錫()은 김알지의 28세손인  경순왕 부의 제5자이다. 그는 고려  태조의 외손으로 의성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그의 자손이 본관을 의성으로  삼게된 것이다. 부의 몇째 아들인가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설이 있다. 1974 5월에 간행된 의성김씨 청계공파세적<경사유방>에는 제4자로 기록되어 있고 다른 문헌에는 제5자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제5자로 기록하였다.

 

<행 렬 자>

31(洛락 永영 浩호 泳영 淵연 漢한) 32(模모 秉병 東동 植식 林임 相상) 33(煥환  衡형 大대 燮섭 昌창 魯노) 34(時시 奎규 達달 在재 聲성 重중) 35(鍾종 鎬호 鏞용 銖수 善선 熙희 鉉현) 36(洙수 源원 澤택 泰태 淳순  河하) 37(權권 穆목 根근 來래 稷직  榮영) 38(憲헌 燁엽

炯형 勳훈 熙희 德덕 悳덕) 39(圭규 赫혁 珪규 周주 裁재 垠은) 40(鍵건 鈺옥 鎰일 銓전 鍊련) 41(溶용 濟제 海해 浚준 洪홍) 42(炳병 楨 和화 秀수 彬빈) 43(榮영  炳병 燁엽 文문 道도) 44(建건 培배 均균 達달 中중)

 

伊川金氏(이천김씨)

 

시조 金順傑(김순걸)의 세계와 사적은 미상이다. 아들 춘과 언남은 통정으로 이천에 토착한 사족이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이천으로 하여 세계를 계대하고 있는 것이다.

 

<행 렬 자>

10(致치) 11(心심) 12(鳳봉) 13(珏옥) 14(斗두) 15(洙수)

 

義州金氏(의주김씨)

 

시조가 구산군 김성갑으로 되어 있을뿐 계대를 상고할 수 없을뿐 더러 시조의 생존 연대도 미상이다. 다만 1930년의 조사에 의하면 그 후손들이  경북 안동군 임하면 천전동에 1백여호가 살고 있다.

 

長淵金氏(장연김씨)

 

시조 김정신은 경순왕의 후손으로 시호는  문정이다. 1047(고려문종1) 문과에 장원하고 벼슬이 시중에 이르렀다. 1930년 국세조사에 의하면 그 후손들이  평남 대동군 청용면 삼합리에 22호 평북 정주군에 62호 평북 선천군 수청면 고읍동에 23호가 살고있다.

 

積城金氏(적성김씨)

 

적성은 경기도 파주군의 속면이다. 시조 김상환의 자는 문원이며 1636(인조14)생으로 평양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몽입으로 그는 1669(현종10)년식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벼슬이 감찰에 이르렀다. 1930년 조사에 의하면 그 후손들은 평북 평원군 공덕면 송매리에 21호 평북 의주시 탑산동에 10호가 살고 있다.

 

全州金氏(전주김씨)

 

시조 金台瑞(김태서)는 경순왕의 9세손(경순왕 4자 은설의 8세손)으로 경주김씨와 동원이다. 1254(고려 고종41)몽고의 침입으로 식읍 경주를 버리고 전주로 이주하였다. 그는 삼사수태위 추밀원부사, 상장군, 이부상서, 문하시랑평장사, 보문각,  대제학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으며 전주(완산)군으로 봉해졌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전주로 삼은 것이다. 그는 1257(고종44) 6월에 죽었으며 시호는 문장이다.  묘소는 전북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에  있다.

 

<행 렬 자>

28(永영 琪기 洛락 麗려 若약) 29(喜희 俊준 澤택 鉉현 甲갑) 30(稷직 承승 鳳봉 益익 寃원) 31(淳순 炳병 坤곤 致치 奎규) 32(洛락 均균 聖성 錫석) 33(鎭진 政정 郁욱)

 

貞州金氏(정주김씨)

 

시조 金守(김수)의 선세대와 사적은 병화로 인해 문적이  소진되어 미상하나 누대를 정주(개성의 고호) 풍덕에 정착세거하면서 1785(을사) 1828(무자) 1939(기묘)에 세보를 개간하였다. 관적을 얻은 연대는 미상하나 후손들이 세거지인 정주를 본관으로 하고 있다.

 

<행 렬 자>

 

15(烈열) 16(基기) 17(鍾종) 18(洪홍) 19(楨정) 20(炳병) 21(坤곤) 22(鎭진) 23(淵연) 24(柱주)

 

珍島金氏(진도김씨)

 

시조 김국빈 고려때 군정사에 이르렀으며 그의 후손들이 진도에 토착세거 함으로써  본관을 진도라고 하였다.

 

<행 렬 자>

46(永영) 47(守수) 48(福복) 49(春춘) 50(宗종) 51(元원) 52(鳳봉) 53(聖성) 54(恒항) 55(鼎정) 56(聲성) 57(坤곤) 58(錫석) 59(河하)

 

振威金氏(진위김씨)

 

시조 김기문은  의 아들로 1535(중종30)생이며 자는 금숙이다. 1567(명종2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명천현감을 지냈다. 1930년의 조사에 의하면 그 후손들이 함남 단천군 수하면 하운승리에 36호 함남 단청군 북두일면 대흥리, 신덕리, 용천리에 47호가 살고 있다.

 

鎭岑金氏(진음김씨)

 

중조 김극복은 신라 경순왕의 후예로 그의 선조가 국가에 유공하여 진음군에  봉해졌으므로 본관을 진음이라하여 분적하였는데 누차의 병화로 선대의 문헌과 유적이 상실되어  계대를 밝히지 못하고 세종때 통정대부로 도승지를 지낸 김극복(자 호경)을 중조로 하고 소목이 확실한 김희로부터 기1세하여 계승한다.

 

<행 렬 자>

15(鎬호 錫석) 16(淵연 淳순) 17(秉병 東동) 18(熙희  煜욱) 19(在재 時시) 20(鉉현 鎔용) 21(治치 泰태) 22(柱주 根근) 23(燦찬 勳훈) 24(基기 培배)

 

晋州金氏(진주김씨)

 

진주김씨는 시조를 달리하는 두계가 있다. 한계통은 김알지의 28세손 경순왕 8자인 추를 시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는데 그는 고려초에  진성군(진주의 고호)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진주로 하고 있다. 그리고 가락국 김수로왕의 13세손 김유신 장군의 2째아들인 원술을 시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는데 그는 672(문무왕 12) 당군과 싸움에서 패하자 왕명을 욕되게 하고 가훈을 더럽힌 죄로 부모에게  버림을 받고 태백산에 응거하였다. 뒤에 매소성(양주) 싸움에 당군을 대파 많은 공을 세우고 표상을 받았으나 부모에게 용서받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끝내 벼슬에 나가지 않고 진주에 살았으므로 그의 후손들은 본관을 진주로 하였다.

 

鎭川金氏(진천김씨)

 

시조 金斯革(김사혁)은 강릉김씨에서 분적되었다. 그는 1320 1 16일 진천에서  출생했으며 자는 문위 호는 절정 시호는 충절이다. 1359(고려 공민왕) 동북면행영병마부사가 되었고 1379년에는 판추밀원사가 되었다. 양광도상원수로 있을  때 공훈으로 병부상서 판추밀원사겸 익위공신지문하부사가 되었다. 1382 12 20일 그가 죽자  충북 진천군 백곡면 와곡에 장례 했다. 그래서 후손들이 진천에 세거하면서 본관을 진천으로 하였다.

 

<행 렬 자>

37(振진) 38(起기) 39(南남) 40(來래) 41(東동) 42(猷유) 43(成성) 44(玄현) 45(元원) 46(世세) 47(鎬호) 48(泰태) 49(模모) 50(炳병) 51(在재) 52(鎔용) 53(萬만) 54(九구) 55(命명) 56(寧녕) 57(茂무) 58(紀기) 59(庾유) 60(宰재)

 

昌原金氏(창원김씨)

 

시조 金乙軫(김을진)은 신라 경순왕의 18세손으로 초명은 광준이다. 벼슬은 금자광록대부태자첨사를 지냈고 홍건족을 토벌한데 유공하여 희원(창원의 고호)군에 봉해짐으로써 그의 후손들은 본관을 창원으로 하였다.

 

<행 렬 자>

(전북부안)

1(洛락) 2(植식) 3(炳병) 4(吉길) 5(鍾종) 6(浩호) 7(相상) 8(烈열) 9(在재) 10(鎰일)  11(漢한) 12(述술)

 

(경북상주)

1(泰태) 2(榮영) 3(炫현) 4(奎규) 5(鎭진) 6(洛락) 7(根근) 8(炯형)

 

昌平金氏(창평김씨)

 

시조 金錫奎(김석규)는 조선초기에 창평에 토착한 사족으로서 주부를 지냈다. 그리하여 창평에 세거하게 된 후손들이 창평을 본관으로 세계를 계대하고 있다.

 

<행 렬 자>

23(儒유) 24(緖서) 25(敏민) 26(憲헌) 27(啓계) 28(範범) 29(載재) 30(行행) 31(建건) 32(聖성) 33(奎규) 34(善선) 35(源원) 36(植식) 37(熙희) 38(基기) 39(鎭진 鎬호) 40(洙수)  41(秉병) 42(列열 裕유)

 

淸道金氏(청도김씨)

 

시조 金之岱(김지대) 1219(고종9) 문과에 급제하고  보문각교감, 진주목사, 경상도 안찰사, 정당문학, 이부상서를 거쳐 금자광록대부중서시랑평장사를  지내고 오산(청도 고호)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을 청도라 하였다. 시호는 영헌이며  묘소는 경복 청도군 청도읍에 있다.

 

<행 렬 자>

21(萬만) 22(熙희) 23(時시) 24(鎭진) 25(浩호 承승)  26(載재 在재 植식 東동) 27(善선 鎭진 燦찬 昌창) 28(永영 潤윤 勳훈) 29(植식 鍾종) 30(丙병 大대 淳순) 31(基기 純순 相상  秉병) 32(鍾종 魯노 杰걸) 33(淳순 恭공 在재) 34(東동 程정 鉉현) 35(燮섭) 36(喜희)

 

淸州金氏(청주김씨)

 

청주김씨는 본관을 같이 하면서 시조를 달리하는 3계통이 있다. 이를 계통별로 분류하면 그중한 계통은 김알지의 원손 정을, 다른 한 통은 김방경의 6세손 하통을, 또 다른 한  계통은신라 경순왕의 제 7자 김선의 15세손  사지를 각각 시조로 하고 있다.  ① 김정계의 세보에 의하면 시조 김정은 신라 경순왕의 제6자로서 공이 있어 청주군에 봉해지고 청주를 식읍으로 받았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청주로 하였다고 한다. ② 시조 김하통의 아버지 사의는 고려말에 벼슬하다가 이성계가 개국하자 절의를 지켜 조선에 벼슬하지 않고 청주에  은거하였다. 그후 하통이 함경도 함흥으로  이거하여 세거함으로써 후손들이 조상의  원주지 청주를 본관으로 하고 하통을 시조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③ 시조 김사지는 청주에 도착한 사족의 후예로 문과에 급제 좌랑, 전적을 거쳐 연산군때 참의에 이르렀는데 1498(연산군4) 무오사화때 함경도 흥원으로 유배되어 그곳에  세거하면서 조상의 세거지 청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한다.

 

<행 렬 표>

(김정계)

32(元원) 33(亨형) 34(利이) 35(貞정) 36(仁인) 37(義의) 38( ) 39(智지)

 

(김하통계)

57(斗두 烈열) 58(鍾종 敎교) 59(求구 鎬호) 60(禎정  永영) 61(容용 集집) 62(時시 熙희) 63(鉉현 均균) 64(河하 善선)

 

(김사지계)

11(遠원) 12(大대) 13(行행) 14(彦언) 15(圭규) 16(鍾종) 17(在재)

 

 

淸風金氏(청풍김씨)

 

金大猷(김대유)는 김알지의 45세손이며 신라 경순왕의 아들 김은설의 장자 김정구의 17세손이다. 그는 고려조에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렀고 청성(청풍) 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청풍으로 하게 되었다. 묘소는 충북 제천군 청풍면 백사에 있다.

 

<행 렬 자>

26(周주) 27(九구) 28(昞병) 29(寧녕) 30(成성) 31(紀기) 32(庸용) 33(宰재) 34(重중) 35(揆규)

 

 

春陽金氏(춘양김씨)

 

춘양은 안동속현이다 <조선씨족 통보> <전고대방> 등 제문헌에는 고려 총선왕때의 공신으로 첨의 중찬을 지낸 김이가 시조라 하였을 뿐 그 선계나 후계에 대해선 언급된 바가  없다. 시조 김이의 초명은 지정 또는 정미며 자는 열심, 은지, 시호는 광정이다. 그는  나이 불과 10여세에 도평의사서이가되고 1288(충렬왕14) 23세의 젊은  몸으로 장흥부수령이 되었다. 1290년 합단이 침공하였을 때 조정에서 농사를 짓지말고 요충지에서 방위에 주력하라는 명이 내려졌는데도 이를 어기고 부민에게 농사를  짓게 하여 인근 주군까지 굶주림을  면케 하였다. 298년에는 충선왕을 시종하여 원나라에 들어갔었고 왕의 부자를 이간 시키려는 간신배를 제거하는데 공이 컸다. 1313(충선왕 5) 지밀직사사를 거쳐 첨의평리에  수성보절공신이 되고 1320년 차성사에 경산군으로 봉해졌으며 1326년 첨의 정승에 올랐다가 이듬해 중찬이 되고 추충보절동덕공신이 더해졌다. 그는 1265(원종6)에 나서 1327년에 죽었다.

 

忠州金氏(충주김씨)

 

시조 金南吉(김남길)의 상계연대 및 문헌이 실전되어 상고 할 수 없고 다만 그가 국가에 유공하여 충원(충주 고호)군에 봉해졌다는 사실만 전할뿐이다. 그의 후손 종해의 4세손 영익이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을 지내고 한성에서 황해도 백천으로 이주한 후 남길을 시조로 종해

1세조로 하고 본관을 충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행 렬 자>

13(熙희) 14(培배) 15(鎭진) 16(源원) 17(東동) 18(煥환) 19(達달) 20(鎬호) 21(潤윤) 22(相상) 23(炳병) 24(圭규) 25(鍾종) 26(河하) 27(桂계) 28(烈열) 29(基기) 30(鎔용) 31(洪홍) 32(柱주)

 

漆原金氏(칠원김씨)

 

시조 金永哲(김영철)은 칠원에 도착해 살던 사사족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그래서 그의 후손들이 칠원에 세거하면서 본관을 칠원이라고  하고 그를 시조로 계대하고 있는 것이다.

 

<행 렬 자>

16(興흥) 17(鎭진) 18(徹철) 19(栢백) 20(烈열) 21(圭규) 22(鏞용) 23(準준)

 

太原金氏(태원김씨)

 

시조 金學曾(김학증)은 명나라 신종때  복건성 도어사로 요동에서 공을  세워 한림태원백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평은 기주태원 사랆으로 한림시강을 역임하고 명나라가 망한후 1626년 우리나라 김해 대종산 아래로 이주하여 정착세거 하였다. 이후 후손들이 본관을 태원이라고 하였다. 숙종때 호조참판을 추증 하였다.

 

<행 렬 자>

11(相상 榮영) 12(煥환 炯형) 13(圭규 在재) 14(鍾종  鉉현) 15(泳영 澤택) 16(東동 穆목) 17(炳병 熙희) 18(基기 珣순)

 

通川金氏(통천김씨)

 

시조 金較(김교)는 경순왕 부의 장자 일(마의태자)  후손으로 고려 광종때 통천군에 봉해졌으므로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통천으로 하였다. 그리고 그의 12세손 원등을 1세조로 하여 계대를 하는 파도 있다.

 

<행 렬 자>

15(基기) 16(昌창) 17(源원) 18(柄병) 19(煥환) 20(重중) 21(鉉현)

 

坡平金氏(파평김씨)

 

시조 金長壽(김장수)의 호는 포제 시호는 충간이라 한다. 그는 경술의 일인자로 고려 공민왕때에 홍건적을 격퇴한 공으로 상장군에 승진되고 1363년 김용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평정하려다 순국했다. 평정후 충절로 일등공신파평군에 추봉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은 본관을  파평으로 하고 있다.

 

<행 렬 자>

23(鉉현) 24(泳영) 25(模모) 26(燦찬) 27(基기) 28(鍾종) 29(源원) 30(相상) 31(燁엽) 32(奎규) 33(鎭진)

 

平壤金氏(평양김씨)

 

시조 김려하는 1411(태종11) 식년 문과에 급제하고 서천군수를 지냈다. 1930년 조사에 의하면 그 후손들이 강원도 철원군 근북면 유곡리에 20여호가 살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으나 그 세계는 상고할 길이 없다.

 

平海金氏(평해김씨)

 

시조 김맹절은 준례의 아들로 호는  지지이다. 1466(세조12) 강원도 고성별시에 삼등으로 급제하고 판관에 이르렀다. 일설에 경순왕의 후손(세계미상) 숙흥을 시조라고도 하는데 상고할 길이 없다.

 

豊基金氏(풍기김씨)

 

시조 金崇元(김숭원)의 선세계는 풍기에 세거한 호족이었다. 그의 호는 입석이며 벼슬은 가선대부, 한성부우윤겸, 오위도총부부총판을 역임했다. 벽동으로 낙향하여 사족으로 정착세거하면서 전향지인 풍기를 본관으로 하였다. 묘소는 평북 벽동군 가별면 별하동에 있다.

 

豊德金氏(풍덕김씨)

 

시조 김우앙은 고려 공민왕때 선공서령을 지냈다. 1930년도 국세조사에 의하면 평남 평원군 용호면 연교리에 30, 평남 평원군 해소면 승정리에 16, 함남 고원군 상잔면 도내리 16호가 살고 있다.

 

豊山金氏(풍산김씨)

 

시조 金文迪(김문적)은 신라 시조왕 김알지의 후예로 그의  선계는 문헌이 유실되어 상고할 수 없으나 그가 풍산현(연가부의서현 현안동군)에 시거하면서 고려조에 벼슬을 하였고 공을 세워 좌리공신으로 판사사에 올랐으며 풍산백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여 기세하고 본관을 풍산이라 하였다.

 

<행 렬 자>

21(相상) 22(宗종) 23(重중) 24(奎규 欽흠) 25(洛락) 26(秉병 秀수) 27(燮섭) 28(在재 載재 裁재) 29(鉉현) 30(淵연) 31(東동 柱주) 32(煥환)

 

河陰金氏(하음김씨)

 

하음김씨는 시조를 달리하는 두계통이 있다. 한 계통은 하음(강화의 고호)에 세거한 사족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공조판서에 이른 김희정을 1세로 하는 계통이 있고 또 다른  계통은 경순왕의 제 4자 은설(대안군)의 후예인 김효일을 1세조로 하는 계통이 있다.

 

<행 렬 자>

13(元원) 14(昌창) 15(鎬호) 16(植식) 17(炳병)

 

咸昌金氏(함창김씨)

 

시조 고령가야왕은 41년 김해부 구지봉에서 수로왕과 함께 금합에서 태어났다 하여  김시가 되었으며 고령가야국은 지금의 함창이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이 시조의 발상지라 하여  본관을 함창이라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후 세계를 상고할 수 없으므로 후손인 종제(덕원군)을 중시조로 하고 있으며 그후 세순(의산군) 1세조로  하는 파, (검교소감어사) 1세조로 하는 파등 양파로 나뉘어 있으며 경순왕의 후손인 김선을 시조로 하는 계통이 있다.

 

<행 렬 자>

25(汝여) 26(相상) 27(榮영 烈열) 28(遠원 泰태) 29(錫석 夏하) 30(洙수  一일) 31(東동 植식) 32(容용 俊준) 33(在재 中중) 34(欽흠 瑞서) 35(承승 源원)

 

海州金氏(해주김씨)

 

중조(1) 金孟(김맹)의 선세계는 신라  경순왕의 후손이다. 6대조 김헌은  병조판서로 남한 산성 축성때 화를 입어 해주로 유배되었는데 그때 후손들이 해주로 이사하여 정착세거 하였다. 그러다가 안국의 6세손인 맹이 다시 평안도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세계를 계승하여 본

관을 해주로 하였다. 그리고 또 한 계통은 고려말기에 좌사간을 지낸 김사겸(호 노은)을 원조로 하고 전라도사를 지낸 김문동을 중조로 하여 기세로 승습하고 있는 계통이 있다.

 

<행 렬 자>

(김문동계)

19(鍾종) 20(洛락) 21(柱주) 22(炳병) 23(在재) 24(鎭진)

 

(김맹계)

66(植식 勳훈) 67(炳병 坤곤) 68( 후 鎬호) 69(鎭진  泳영) 70(濬준 根근) 71(相상 炳병) 72(烈열 壎) 73(基기 錫석) 74(銖수 源원) 75(永영 相상) 76(柱주 杰걸)

 

海平金氏(해평김씨)

 

시조 金萱述(김훤술) 시호 장열은  고려 태조때의 개국공신으로 시중이  되었으며 해평군에 봉해졌다. 그리고 원손인 김수가  조선왕조때 예조판서로 해평군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본관을 해평(선산의 고호)이라하고 태를 1세조로 하여 계대하고 있다.

 

<행 렬 자>

25(錫석) 26(永영) 27(在재) 28(顯현) 29(禧희) 30(鎭진)

 

海豊金氏(해풍김씨)

 

시조 金崇善(김숭선)은 고려조에서 벼슬이 예부상서에 이르렀고 해풍부원군에 봉해짐으로써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해풍으로 하게 되었다.  또한 동원 가운데 덕수, 정주 등을  본관으로 쓰는데도 있다.

 

<행 렬 자>

10(然연) 11(圭규) 12(鎭진) 13(溶용) 14(植식) 15(熙희) 16(在재) 17(鍾종) 18(漢한) 19(植식)

 

洪州金氏(홍주김씨)

 

시조 金仁義(김인의)는 신라 경순왕의 제  6자 김건의 후손으로 선세계는  문헌이 유실되어 소목계통을 밝히지 못하나 홍천에서 세거하던  사족이다. 그가 덕천군수가 되어  입지로 갈 때 자손들이 따라가서 용천과 철산에 정착세거 하면서 조상의 록고지인 홍주를 본관으로 하

고 김인의를 1세조로 하여 계세하였다. 그리고 경순왕 제 4자 은설(대안군)의 후예로 전하는 순을 1세조로 하여 계대하는 태천파가 있다.

 

<행 렬 자>

15(英영 赫혁) 16(有유 得득) 17(西서 昌창) 18(濟제 元원) 19(根근 燮섭) 20(洙수)

 

和順金氏(화순김씨)

 

시조 김익구는 두문의 아들로 1645(인조 23) 생이며 평양에서 살았다. 그의 자는 사겸으로 1675(숙종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벼슬이 현감에 이르렀지만 그 전후 세계는 상고할 수 없다.

 

熙川金氏(희천김씨)

 

시조 金佑(김우)는 경순왕의 제 8자 추(一선군)의 아들이다. 고려 강종 때 토적에 공을 세워 신호위대장이 되고 온양군에 봉해졌다. 그의 7세손 용이 온양군 용의 7세손 우(시호 양정)가 병조판서로 1400(정종2) 내란을 평정한 공으로 희천군(위성의 고호)에 봉해졌으므로 그의 후손들이 우를 1세조로 본관을 희천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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