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씨(徐氏)


서씨는 문헌에 165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본서에 기록된 성씨는 11본에 불과하고 나머지 142본에 대해서는 미고이다. 그러나 모든 서씨는 이천서씨의 시조 서신일의 후손으로 짐작된다. 전설에 의하면 고대 기자 조선의 마지막 왕인 기준이 위만에게 쫓겨 지금의 이천땅 서아성에 자리잡은 것이 서씨의 시조라고 한다. 우리나라 서씨 가운데서 기자에 연원을 두고 있는 성은 서씨 청주 한씨 태원 선우씨 행주기씨 등이다. 서씨는 대종이 이천 서씨이지만 명벌로 빼어난 집안은 대구 서씨이다. 삼대 정승에 비롯하여 청송심씨 청풍김씨가 있을 따름으로 그중에서도 6대에 걸쳐 삼정승 삼대제학을 낸 집안은 대구서씨 뿐이다.

 

南陽徐氏(남양서씨)

 

시조 간은 8학사의 한 사람으로서 정관 연간에(627-647) 우리나라에 와 당성(남양의 별호)에 정착해 살면서 태사가 되어 남양군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손자 후후가 고려 현종 때 좌정승으로 계단의 침입을 물리친 공으로 당성군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본관을 남양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행 렬 자>

 

33(熙희) 34(圭규) 35(鍾종) 36(洙수) 37(東동) 38(煥환) 39(在재) 40(鎬호) 41(淵연) 42(榮영)

 

南平徐氏(남평서씨)

 

시조 灝(호)는 신일의 후손으로서 남평에 세거해 왔고 그의 손자인 지는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 중종 때 이조판서에 올랐다. 그래서 이천 서씨에서 분적 세거지인 남평을 본관으로 해서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達成徐氏(달성서씨)

 

시조 得富(득부)는 본래 당성(남양의 별호)에 토착한 사족으로 정관(629-649)년간에 8학사의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당성에 정착해 살면서 태사가 되어 남양군에 봉해졌던 간의 13세손이며 중종때 유명한 경덕(화담)은 그의 증손이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득부를 시조로 하여 남양서씨에서 분적 본관을 당성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행 렬 자>

 

18(挺정) 19(漢한) 20(夢몽) 21(慶경) 22() 23(行행)

 

大丘徐氏(대구서씨)

 

시조 한은 고려 때 조봉대부군기소윤을 지냈으며 2,3,4,5,6세는 세계가 실전되어 자세하지 않다. 후손으로 서거정 등 많은 인물을 낸 명문으로 大丘(大邱)(대구)에 세거했기 때문에 본관을 대구로 해서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행 렬 자>

 

28(源원) 29(東동) 30(德덕) 31(達달) 32(鎭진) 33(永영) 34(模모) 35(烈열) 36(世세) 37(善선) 38(漢한) 39(桂계) 40(慶경) 41(基기) 42(鏞용)

 

扶餘徐氏(부여서씨)

 

시조 餘隆(여륭)은 백제 의자왕의 셋째 아들로 본래의 성은 부여씨라 한다. 백제가 망하자 당나라로 망명 하였는데 당 고종이 「餘(여)」자를 「徐」로 고쳐 사성하고 능진도총에 임명했다 한다. 그후 환국하였다 하나 세계가 실전되었다. 원손 存(존)은 1세조 신일의 6세손으로 고려에서 병부상서를 지내고 태원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본래 서 성인 부여를 본관으로 해서 세계를 계승으로 하고 있다.

 

<행 렬 자>

 

26(鎭진) 27(祿록) 28(榮영) 29(勳훈) 30(基기) 31(善선) 32(承승) 33(植식) 34(炯형) 35(培배) 36(鉉현) 37(昶창) 38(석) 39(裕유) 40(世세) 41(鎔용) 42(潤윤) 43(秀수)

 

連山徐氏(연산서씨)

 

시조 俊英(준영)은 신일의 후손으로 누대연산 지방에 세거하여 왔다. 그 아들 보가 있었으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후손들은 의민(義敏)을 1세조로 하여 이천 서씨에서 분적 연산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행 렬 자>

14(基기) 15(錫석) 16(承승) 17(模모) 18(容용) 19(喆철) 20(鍾종) 21(源원 洙수) 22(寅인 相상) 23(燮섭 烈열) 24(廷정 圭규) 25(鎭진 鎬호) 26(泳영 泰태) 27(穆목 根근) 28(然연 熙희) 29(坤곤 均균) 30(鉉현 鏞용)

 

利川徐氏(이천서씨)

 

서씨는 기자의 42세손 기준이 이천 서하성에 피거한 후부터 그 후손이 서씨가 되었다 하며 혹설에는 여수기가 예국의 추장으로 9자를 두었는데 그 아들들이 제군에 분거하면서 증인에게 많은 공을 베풀기 때문에 중인들은 중인의 「척」변에 「」자를 붙여 徐자로 칭성하였다고 하며 일설에는 백제 의자왕 태자 여륭이 패전하고 당나라에 갔을 때 당나라에서 여륭의 여자를 서자로 고쳐 사성했다고도 한다. 그 중에서 기준의 후손설이 신빙할만하다. 시조 신일은 신라 효공왕 때에 아우를 지내다가 국운이 다함을 알고 의천효양산록에 복성당을 짓고 은거하면서 자칭 처사라하고 후진 양성에 여생을 바쳤다. 그리하여 시조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묘소는 경기도 이천군 부발면 산촌리 효양산에 있고 매년 음 10월1일에 제향한다.

 

長城徐氏(장성서씨)

 

중시조 릉(시호 절효)은 도시조인 신일의 11세손이다. 그는 고려 고종 때 시중을 지내고 장성을 식읍으로 하사받아 그곳에 정착하게 되어 이천서씨에서 분관 장성을 보노간으로 해서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장성 모암서원에 제향.

 

<행 렬 자>

 

26(挺정 鉉현) 27(衍연 泳영) 28(震진 東동) 29(烈열 燮섭) 30(載재 增증) 31(鍾종 商상) 32(淳순 源원) 33(植식 休휴) 34(顯현 炳병) 35(圭규 在재) 36(鎭진 鎰일) 37(洙수 淵연) 38(相상 桂계) 39(熙희 熏훈) 40(堯요 坰경)

 

浙江徐氏(절강서씨)

 

시조 海龍(해룡)은 중국 절강성 사람으로 그의 증손 학이 도총관으로 1597년(선조30) 정유재란 때 우리나라에 와서 공을 세우고 성주 대동방에 정착 세거하여 후손들이 시조의 고향 절강을 본관으로 삼았다.

 

平當徐氏(평당서씨)

 

시조 俊邦(준방) (시호:충효)은 신일의 후손으로 고려때 형부상서로 있으면서 외적이 침입할 때 공을 세워 봉성(파주의 고호)군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본관을 평당(봉성)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석씨(石氏)  (0) 2010.03.29
서씨(西氏)  (0) 2010.03.29
안음서문씨(西門氏(安陰))  (0) 2010.03.29
상주주씨(尙州周氏)  (0) 2010.03.29
목천상씨(尙氏(木川))  (0) 2010.03.29

이 글을 공유하기

댓글

Designed by CMSFactory.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