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30. 13:28
시조(중시조 1세) 곽원의 선조는 신라 헌강왕때 시중을 역임한 곽상인데 그후 세계가 실전되었다. 곽원(시호문성)은 고려 성종때 등과하여 우산기상시, 중추원사, 형부상서를 역임했다. 그리고 그의 10세손인 곽연준(시호충헌)이 광정대부판개성부윤, 통헌전법판사를 지내고 청원군에 봉해지고 청주에 낙향 세거하면서 본관을 청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22(鎭진) 23(濟제) 24(林임) 25(默묵) 26(致치) 27(鍾종 鉉현) 28(漢한 潤윤) 29(榮영 根근) 30(魯노 熙희) 31(信신 基기) 32(鎬호 鏞용) 33(淳순 撤철) 34(采채 來래) 35(燮섭 燁엽) 36(周주 圭규) 37(敏민 善선) 38(泰태 海해) 39(權권 杓표) 40(南남 丙병) 41(重중 瑞서) 42(鍵건 均균) 43(浩호 洙수..
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30. 13:27
문헌에 나타난 인물로는 조선 정조때 진사시에 합격한 천명익이 있다. 1930년 국세조사때 황해도 봉산, 서흥 지방에 12가구 등 14가구가 살고 있다. 본관은 연안, 우봉 2본이 있다.
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30. 13:26
증보문헌 비고에 의하면 천씨가 97본관으로 나타나 있으나 모두 영양천씨의 세거지명을 나타낸 것이다. 천씨는 원래 중국의 성씨로서 시조 천암은 명나라초에 조신을 지냈고 그 후손이 영양에서 세거하였다고 한다. 중시조 천만리(시호: 충장)는 명나라 말기에 문과에 장원 태청전수위 사겸 총독 오군수를 역임하고 1592년(선조25) 임진왜란때 영량사겸 총독장으로 아들 상, 희 형제와 함께 우리나라에 와서 군량수송을 담당하였고 평양 곽산 동래 등지에서 대첩을 거두었다. 그후 정유재란 때도 직산, 울산 등지에서 전공을 세우고 우리나라에 귀화하니 조정에서 가상히 여겨 자헌대부봉조하로 화산군에 봉했고 숙종때 그의 전공을 길이 빛내기 위해 대보단을 설단하여 종향케 했고 전국 10여개 서원에 향사되었다. 중시조 천만리의 묘소..
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30. 13:25
1930년 국세조사때 광주시에 일가구가 살고 있었으나 조사해본 결과 려산송씨의 오기로 밝혀졌다.
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30. 13:24
채씨는 문헌에 49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고려 고종조에 중서시랑평장사를 지낸 경핑공 채송년을 시조로 하는 평강채씨와 채선무를 시조로 하는 인천채씨를 제외하고는 미고이다. 仁川蔡氏(인천채씨) 시조 채선무의 세계는 문헌이 없으므로 상고 할 수 없다. 그는 고려 중기에 동지사를 지내고 동지추밀원사에 추증되었다. 그는 인천에 세거 채씨일문을 이루었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고려말에 호조전서를 지내다가 조선이 개국되자 절개를 지켜 두문동으로 들어가 은거한 채귀하를 증조로 하고 본관을 인천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30(種종) 31(泰태) 32(敎교) 33(稙직) 34(雲운) 35(均균) 36(和화) 37(求구) 38(奎규) 39(秀수) 平康蔡氏(평강채씨) 시조 채송년(시호 경평)의 선세계는 문헌이 실..
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30. 13:23
옛날에는 없던 성씨로 1930년 국세조사 당시 경남 통영에 단 1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1960년 국세조사때 인구 50명 이었으며 관향은 진주 단본이다.
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30. 13:22
창씨는 본래 중국의 성씨로 황제의 아들 창혜의 후손이라 한다. 우리나라에는 공주, 아산, 려산 등 5본이 전하는데 1930년 국세조사 당시 전주, 진안, 익산 등지에 31가구 등 모두 50여 가구가 살고 있다.
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30. 13:21
삼국사기에 창조리란 인물이 전하는데 그가 현재 전하는 창씨와 관련이 있는지는 상고할 수 없다. 그는 294년 남부대사자로 있다가 국상이 되고 대주부에 올랐다. 296년 모용외의 난을 평정하였고 300년에 흉년이 들었는데도 왕이 사치에 빠지자 은퇴하여 은불(미천왕)을 세웠다 한다. 1930년 국세조사때 서울과 경기도에 11가구가 있었고 본관은 아산, 려산, 장성 3본이나 시조는 미고이다.
대한민국 성씨와 본관 무천거사 2010. 3. 30. 13:18
진씨는 문헌에 47본으로 나타나 있다. 진씨는 공자의 제자로서 문묘에 배향된 상을 시조로 진욱이 고려조에 박사로서 진주군에 봉해짐으로써 본관을 진주로한 진주진씨와 신라의 원병으로 백제평정에 참가했다가 귀화한 필명을 시조로 하는 풍기진씨를 제외한 45본에 대하여는 미고이다. 晋州秦氏(진주진씨) 진씨는 전체의 후예이다. 백익이 순제로부터 영씨를 사성받았고 그의 후손 비자가 진이라는 고을에 봉해졌으므로 이로써 성을 삼으니 이에 진성의 시조가 되었으며 시조 진상은 공자의 제자로서 우리나라 문묘에 배향되었다. 진상의 76세손인 욱이 고려조에 박사보리공신 이었으며 진주군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진주로 본관을 삼았다. 욱의 제2자인 계백은 고려 공민왕조에 찬성사로서 홍윤, 최만성 등과 정사를 의존하다가 마침내 그들이..
진씨는 원래 중국의 성씨로서 송나라때 복주출신인 진수가 우윤 벼슬을 지내다 국난이 일어나자 우리나라에 건너와 려양현(현 충남 홍성군 장곡면) 덕양산 아래 정착세거 하였는데 그의 후손인 총후가 비로소 고려 예종때 벼슬이 신호위대 장군에 이르고 인종때 이자겸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려양군에 봉해짐으로써 그의 후손들이 총후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려양으로 하게 되었다. 그외에 삼척, 나주, 강릉을 본관으로 한 진씨가 있으나 이미 려양진씨 대동보에 환보하여 려양진씨로 일원화 되었고 진산 광동을 본관으로 한 진씨는 려양진씨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고증할만한 문헌이 없어 자세하게 알수가 없다. 그외에도 120여 본관이 문헌상에 나타나 있으나 이또한 미고이다. 24(夏하) 25(成성) 26(範범 熙희) 27(庸용 廣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