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씨(崔氏)


 최씨는 문헌에 326본으로 나타나 있다. 최씨는 우리나라 성씨 가운데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씨족으로서 그 연원은 신라의 사노(서라벌 기원전 50년경) 6부촌 중의 돌산 고허촌(사랑부)장 소벌도리를 범최씨의 원조로 하고 있는데 소벌도리의 24세손 최치원의 윗대에서 분파된 관향으로는 개성, 삭녕, 동주(철원), 전주(최군옥파) 최씨가 있고 최치원 이후의 분파된 관향으로는 함양, 청주, 영흥, 용강, 수원, 부안, 강릉, 강화, 화순, 통천, 양천, 원주 등이 있다.
 그외에도 해주, 진주, 탐진, 전주(최균파)가 그 지손에서 분관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조에 응기한 최씨가 고려조에 등장하여 역사를 수놓고 있는 가운데서도 경주최씨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해주 최씨와 우봉최씨도 숱한 인물을 배출하여 세력을 떨쳤다. 그밖에 전주와 동주최씨도 상당한 세력을 폈다. 최씨 인구는 현재 150만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며 김, 이, 박씨 다음가는 대성씨 이다. 문헌에 나타난 326본중 경주최씨를 비롯한 43본 외는 미고이다.

杆城崔氏(간성최씨)

 

간성최씨의 원유는 강릉최씨이다. 고려 태조의 부마로 대경을 지낸 흔봉(강릉최씨 시조)의 20세손 무동이 간성에서 살다가 은성으로 이주하였는데 그의 후손들은 조상이 간성에서 왔다고 하여 강릉최씨에서 분적 본관을 간성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 태조때 경원부원군에 봉해진 필달의 15세손 지순(강릉최씨 시조)이 조선 개국때 간성군에 봉해졌으므로 강릉최씨에서 분적 간성최씨로 세계를 이어오는 파도 있다.

 

<행 렬 자>

40(永영) 41(權권) 42(炳병) 43(基기) 44(鍾종) 45(浩호) 46(楨정) 47(炷주)

 

江陵崔氏(강릉최씨)

 

시조 최필달의 상계는 문헌이 실전되어 상고할 수 없다. 우리나라 모든 최씨의 시조는 신라의 전신인 사노 6촌중의 돌산 고허촌(사랑부)장소 벌도리의 혈손이라는 일반적인 통염에 비추어 최필달 또한 소벌도리의 후예로 믿어지나 혈연적 계보와 분파 연원을 체계화할 방도가 없다. 그는 고려개국때 왕건(태조)을 도와 삼중대광삼한벽상개국찬화공신으로 영첨의좌정승이 되고 경원(강릉의 별호) 부원군에 봉해짐으로써 본관을 강릉최씨이면서도 태조의 부마로 대경을 지낸 최흔봉을 시조로 하고 그의 12세손 입지가 고려말에 문하평리상호군을 지내면서 공을 세워 강릉군에 봉해짐으로써 본관을 강릉이라 하여 세계를 이어오는 계통이 있다.

 

<행 렬 자>

(최필달계)

40(亨형) 41(重중) 42(貞정) 43(重중) 44(祿록)

 

(최흔봉계)

27(桂계) 28(炳병) 29(奎규) 30(弘홍) 31(根근) 32(澈철) 33(東동)

 

江華崔氏(강화최씨)

 

시조 최익후는 최치원의 후손으로 분파연원은 상고할 수 없다. 그는 고려 중엽에 상서우복사정당문학을 지내고 강화에 세거하면서 사족의 기틀을 이루었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강화라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행 렬 자>

30(燮섭) 31(在재) 32(欽흠) 33(彦언) 34(柱주) 35(炯형) 36(均균) 37(鎭진) 38(洙수) 39(相상) 40(煥환) 41(憲헌) 42(鎬호) 43(永영) 44(植식) 45(烈열) 46(達달) 47(鎔용) 48(漢한) 49(東동) 50(熙희) 51(塡전) 52(善선) 53(淙종)

 

開城崔氏(개성최씨)

 

시조 최우달은 원래 토산현(현 평북 중화군)사람으로 신라의 대상이 었다. 그의 아들 응이 고려 태조를 도와 고려 건국에 공이 컸으며 누대 개성에 세거하면서 호족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 후손들이 우달을 시조로 하고 개성을 본관으로 하였다.

 

<행 렬 자>

20(斗두) 21(容용) 22(坤곤) 23(鍾종) 24(泰태) 25(東동) 26(熙희) 27(奎규) 28(錫석) 29(洛락)

 

慶州崔氏(경주최씨)

 

시조 문창후 최치원은 신라의 전신인 사노(서라벌 기원전 50년경) 6촌중 돌산 고허촌(사랑부)의 촌장 소벌도리의 24세손으로 전해지고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6촌장은 모두 천강인으로 이, 최, 손, 정, 배, 설로 각각 사성 받았으니 소벌도리가 득성시조 이다. 그로부터 24세에 이르러 최치원이 869년(신라문경왕9) 12살의 어린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 5년후 17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승무랑시어사 내공봉에 이르고 자금어의를 하사 받았으며 제도행영병마도총 고변의 종사관을 역임하고 환국 시독겸한림학사수병부시랑지서서감이 되었으나 외직을 청원하여 대산, 천령, 부성 등지의 태수를 지내고 시무 10여조를 상소하여 시행케 하여 아손이 되었다. 그후 난세를 비관하며 전국을 유랑하다가 해인사로 들어가 은거하면서 수도하고 63세로 여생을 마쳤다. 고려 현종이 그의 조업에 밀찬한 공을 가히 잊지 못할 것이라 하며 1020년(현종11) 내사령을 추증하였고 1022년 5월에 문창후를 추봉하였다. 그리고 득성시조로부터 대대로 경주(월성 계림)에 세거하였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경주로 하여 최치원을 시조로 하고 승습하였으며 그 후손으로 청(관가정공파), 단(광정공파), 호(정랑공파), 예(사성공파), 현우(화숙공파), 광위(충렬공파) 등 6개 파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행 렬 자>

32(模모 圭규) 33(柄병 鎔용) 34(鐸탁 汶문) 35(來래 東동) 36(時시 先선) 37(鏞용 在재) 38(洙수 鐸탁) 39(根근 漢한) 40(夏하 敏민) 41(聲성 植식)

 

鷄林崔氏(계림최씨)

 

시조 최윤순은 본래 경주인으로 신라때에 계림(경주의 별호)부태수를 지냈다.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하여 경주에서 분적 본관을 계림이라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후손들의 분포 상황에 대하여는 상고할 길이 없다.

 

古阜崔氏(고부최씨)

 

시조 최척은 최치원(문창후)의 후손으로 판봉상사사를 지냈다. 그가 평북 구성에 세거하면서 그 후손들이 본관을 전 거주지인 고부로 하였다고 한다.

 

<행 렬 자>

20(鍾종) 21(源원) 22(相상) 23(燮섭) 24(載재)

 

曲江崔氏(곡강최씨)

 

시조 최호는 경주최씨에서 분적한 전주 최씨의 시조 순작의 증손 균의 11세 손이다. 그가 고려 때 곡강부원군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본관을 곡강으로 그를 시조로 하였으나 그후 누대가 실전되었으므로 그의 후손 여실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이 외에 같은 최호를 시조로 하는 흥해최씨가 있으나 분파계대를 상고할 수 없다.

 

<행 렬 자>

11(大대) 12(錫석) 13(淳순) 14(有유) 15(翼익) 16(鳴명)

 

廣州崔氏(광주최씨)

 

시조 최득보는 최치원(문창후)의 원손으로 상계는 상고 할 수 없으나 조선조에 장사랑 훈도를 지내고 평안도 안주로 이사하여 그곳에 정착세거하면서 전 거주지인 광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행 렬 자>

15(尙상 山산) 16(耉구 信신) 17(善선 基기) 18(應응 聖성) 19(永영 燁엽)

 

朗州崔氏(낭주최씨)

 

시조 최흔의 선세계는 문헌이 실전되어 상고 할 수 없다. 그는 랑주(영암의 별호)에 토착한 사족의 후예로 신라 효공왕, 신덕왕, 양조에 걸쳐 원보상을 지내고 기틀을 잡아 가세가 크게 번창하였으므로 후손들이 랑주에 세거하면서 본관을 랑주라 하고 세계를 계승하였다 한다.

 

<행 렬 자>

16(在재) 17(鎭진) 18(漢한) 19(采채 杓표) 20(炳병 燾도) 21(基기 琪기) 22(鍾종 錫석) 23(淳순 洙수 澈철) 24(相상 東동 采채) 25(煥환 燮섭 燾도) 26(重중) 27(鎬호 鎔용 錫석) 28(泳영 浩호) 29(秀수 述술) 30(炯형 炫현)

 

東州崔氏(동주최씨)

 

시조 최준옹은 득성시조 소벌도리의 22세손 계양성의 증손으로 고려 태조를 도와 통합삼한공신, 삼중대광, 태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증손 석이 문종때 감수국사, 상수국, 판상서이부사를 지내고 동주(철원의 고호)에 세거하였으므로 후손들이 최준옹을 시조로 하고 본관을 동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행 렬 자>

31(雲운) 32(桂계) 33(屹흘) 34(麟린) 35(根근)

 

扶安崔氏(부안최씨)

 

시조 최창일은 고려말에 상호군 공조전서를 지내다가 조선이 개국되자 부안으로 낙향하였다. 아들 최도명이 세종때 호조좌랑으로 왕에게 직간을 하다가 길주의 명원으로 유배되었다. 그리하여 그곳에 정착세거하면서 본향인 부안을 본관으로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선세계는 청주최씨에서 분적되었다.

 

<행 렬 자>

22(鎰일 鍾종) 23(洙수 泰태) 24(榮영 根근) 25(謙겸) 26(載재) 27(鎭진) 28(浩호) 29(模모) 30(益익) 31(用용) 32(錫석)

 

朔寧崔氏(삭녕최씨)

 

시조 최천로의 선계는 문헌이 실전되어 상고할 수 없다. 그는 고려때 평장사를 지냈고 그의 아들 유가 또한 평장사를 지냈다. 삭녕정언동을 평장동으로 개칭하여 세거하였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삭녕이라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행 렬 자>

19(遇우) 20(九구) 21(炳병) 22(宇우) 23(成성) 24(範범) 25(康강) 26(新신) 27(聖성) 28(揆규)

 

隋城崔氏(수성최씨)

 

시조 최영규(시호 문헤)의 본성은 김씨이다. 그는 신라 경순왕 김부의 17세손으로 1261년 (원종2) 문과에 급제 형조전서 남부전서겸 보문각 대경으로 있으면서 문학으로 교회하니 서경에서 명망이 높았다. 충렬왕때 수원 일대가 기강이 퇴폐하고 일륜을 지키지 않아 금수와 가까움을 왕이 개탄하고 군신 가운데 누가 다스려서 풍속을 순화 하겠느냐? 하니 그가 자청하여 호장장으로서 부사 안설과 함께 나아가서 효도로 인도하고 의리로 설복하니 1년이 못되어 효제지향으로 변했다. 왕이 가상히 여겨 1302년(충렬왕28) 크게 포상하고 그 공이 최외와 같다 하여 최씨로 사성하고 수성백에 봉했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하고 본관을 수성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나가고 있다. 한편 같은 혈손이면서 상계가 실전되어 소목을 밝히지 못하고 고려 때 봉열대부서운부정을 지낸 거경을 1세조로 하여 계대하는 계통이 있다. 시조 최영규의 묘소는 경기도 화성군 매송면 어천리 병좌에 있다.

 

<행 렬 자>

(영규계)

20(淳순) 21(柄병) 22(爀혁) 23(重중) 24(鎔용) 25(源원) 26(根근) 27(顯현) 28(球구) 29(贊찬) 30(洙수) 31(寅인) 32(烈열) 33(廷정) 34(九구) 35(濬준) 36(彬빈) 37(然연) 38(채) 39(善선) 40(雨우) 41(東동) 42(性성) 43(墩돈)

 

(거경계)

15(其기 廷정) 16(鉉현 模모) 17(潤윤) 18(休휴) 19(炳병) 20(周주) 21(鍾종) 22(洙수) 23(根근) 24(煥환) 25(在재) 26(錫석) 27(漢한) 28(榮영)

 

 

水原崔氏(수원최씨)

 

시조 최장저는 고려초(927) 수원의 호장이다. 아들 루백은 인종 때(1122) 정의 대부 한림학사로서 아버지가 호랑이에 잡혀먹혀 원수를 갚음으로서 효숙공에 추서되었고 그효행으로 고려삼강효행도에 수록되었다. 묘소는 봉담면에 있다.

 

<행 렬 자>

27(一部 一O) 28(二部 O祚) 29(三部 庠O) 30(四部 O寧) 31(五部 五O) 32(六部 O交) 33(七部 虞O) 34(八部 O兌)

 

牙山崔氏(아산최씨)

 

아산최씨는 해주최씨에서 분적되었다. 시조는 사과를 역임한 최예립인데 선대는 누대 아산에 세거하다가 최예립이 정주지방으로 이주하면서 선대의 고향인 아산을 본관으로 삼았다.

 

<행 렬 자>

31(洛락) 32(業업) 33(燦찬) 34(培배) 35(錫석) 36(洽흡) 37(相상) 38(煥환) 39(基기) 40(鉉현)

 

楊州崔氏(양주최씨)

 

시조 최억(시조 문경)은 학문과 덕행이 높아 태사에 처거되었고 1353년(공민왕2)에 호부상서로 양주군에 봉해짐으로써 그 후손들이 본관을 양주로 하였다. 묘소는 충북 청원군에 있다.

 

<행 렬 자>

(정연공파)

20(秀수) 21(默묵 煥환) 22(基기 圭규 用용) 23(鍾종 鐸탁 錫석) 24(淳순 泳영 準준) 25(東동 相상) 26(燮섭 烈열) 27(在재 聖성) 28(鉉현 善선) 29(海해 淇기) 30(權권 述술) 31(熙희 榮영) 32(塾숙 豊풍) 33(銖수 銑선)

 

(정안공파)

19(世세) 20(王왕) 21(炳병) 22(士사) 23(鎬호) 24(永영) 25(東동)

 

陽川崔氏(양천최씨)

 

시조 최원은 고려조에 붕선대부 밀직부사로 유공하여 양천백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전주에서 분적하고 그를 시조로 본관을 양천이라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행 렬 자>

21(燮섭) 22(益익) 23(鉉현) 24(濟제) 25(植식)

 

延豊崔氏(연풍최씨)

 

연풍최씨는 경주최씨에서 분적된 것이지만 상계는 상고하기 어렵다. 시조 최지강은 고려때 진사로 안화(연풍)에 세거하여 후손들이 본관을 연풍으로 하고 있다.

 

<행 렬 자>

15(輔보) 16(國국) 17(鳳봉) 18(麟린) 19(義의) 20(文문)

 

永川崔氏(영천최씨)

 

영천최씨의 원유는 전주최씨이다. 문헌이 실전되어 분파계대를 상고할 수 없고 최한이 고려 의종 명종 양조에 벼슬하면서 공을 세워 연산(연천의 별호)부원군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있다. 묘소는 경북 군위군 송현에 있다.

 

<행 렬 자>

22(翰한 祥상) 23(鳳봉 圭규) 24(基기 一일) 25(錫석 鎭진) 26(洙수 源원) 27(相상)

 

永興崔氏(영흥최씨)

 

시조 최지미의 자는 천보요 그의 손자 한기가 환조대왕(이태조의 아버지)의 빙부가 되어 영흥백에 추봉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최지미를 시조로 하고 경주에서 분적본관을 영흥이라 하고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묘소는 영흥군 덕흥면 진동리에 있다.

 

<행 렬 자>

28(鳳봉 錫석) 29(達달 立입) 30(基기) 31(熙희 鳳봉) 32(泳영)

 

完山崔氏(완산최씨)

 

시조 최순작(시호 문열)은 고려조에 검교신호위상장군으로 완산군에 봉해졌다. 그러나 그후 계대가 실전되었고 그 후손 최수강이 고려 말에 벼슬을 버리고 경상도로 낙향하여 그곳에 정착하였다. 그리하여 그 후손들이 그를 중시조로 기1세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본관을 완산이라 하였다.

 

<행 렬 자>

24(鎬호) 25(洛락) 26(林임) 27(然연) 28(喆철) 29(鎔용) 30(準준) 31(種종)

 

龍崗崔氏(용강최씨)

 

시조 최지무는 고려때 무과에 급제 상호군 판선공감사로 공이 있어 용강군에 봉해졌다. 그후 손자 최개산이 조선 세조때 문과에 급제 감무, 호조판서로 직간을 하다가 북방으로 유배되면서부터 후손들이 그곳에 정착세거하게 되었고 청주최씨에서 분적 최지무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용강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행 렬 자>

17(敎교) 18(鎭진) 19(求구) 20(根근) 21(燮섭) 22(埈준) 23(善선) 24(泰태) 25(模모) 26(炫현) 27(均균) 28(鎔용)

 

龍宮崔氏(용궁최씨)

 

시조 최현은 해주최씨에서 분적했다. 고려조에 평리부밀직사사를 역임하고 손자인 최유는 군부판서로 충혜왕을 호종한 공으로 성근익재협찬보정 1등 공신에 책록되고 취성군에 봉하여졌으며 공민왕 때에 삼사사 용성(용궁별호) 부원군에 봉하여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을 용궁으로 하고 있다. 묘소는 경기도 개성에 있다.

 

<행 렬 자>

20(翼익) 21(鳳봉) 22(鎬호) 23(泰태) 24(植식)

 

牛峰崔氏(우봉최씨)

 

시조 최원호의 상계는 상고 할 길이 없다. 그는 고려중엽에 우성공신으로 삼중대광문하시중상장군을 지냈고 고려 희종때 문하시중으로 진강군 개국후에 봉해진 최충헌, 고려 고종때 환도공신으로 진양후에 봉해진 최우로 이어져 왔다. 후손들이 최원호를 시조로 하고 우봉(김천의 고호)에 세거하면서 본관을 우봉으로 하여 계대하고 있다.

 

原州崔氏(원주최씨)

 

시조 최보은의 상계는 경주최씨에서 분적된 계통이라고 하나 분파계대를 상고할 길이 없다. 다만 그의 조상이 강원도 원주에 토착하였었고 그가 1434년(세종16) 호용위사대호군으로 임지인 함경도 명천에서 세거하였는데 후손들이 조상의 연고지 원주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全州崔氏(전주최씨)

 

전주최씨는 경주최씨와 동원이다. 득성시조 소벌도리의 후예로 고려초에 평장사를 지내고 완산(전주의 고호)백에 봉해진 최언휘의 혈손이라고 하나 소목이 확실치 않으므로 고려 정종때 문과에 급제하고 문하시중으로 완주 개국백에 봉해진 순작(시호 문열)을 시조(1세)로 하고 본관을 전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이외에 본관이 같으면서 계통이 다른 두파가 있으니 한 계통은 고려때 동북로도지휘사가 되어 조이총의 난에 순절하고 완산군에 추봉된 균을 시조(1세)로 하고 있으며 또 한 계통은 고려때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내고 완산 부원군에 봉해진 군옥(시호 문충)을 시조로 하여 각각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과거에는 순작파, 아파, 균파, 군옥파 4파로 분류 세거하였으나 그중 아파는 아가 순작의 7세손이라는 고증이 발견되었다.

 

<행 렬 자>

(순작파)

24(鎭진) 25(澈철) 26(植식) 27(炳병) 28(奎규) 29(鍾종) 30(洛락) 31(東동) 32(燮섭) 33(遠원) 34(鎬호) 35(承승) 36(根근) 37(容용) 38(敎교) 39(善선) 40(洙수) 41(相상) 42(陽양) 43(用용)

 

(균계)

25(重중) 26(鍾종) 27(淳순) 28(秉병) 29(燮섭) 30(奎규) 31(鎭진) 32(源원) 33(植식) 34(炳병) 35(翼익) 36(錫석) 37(永영) 38(秀수) 39(烈열) 40(善선) 41(鉉현) 42(承승) 43(東동) 44(炯형) 45(基기)

 

(군옥계)

26(植식) 27(炳병) 28(圭규) 29(鎔용) 30(漢한) 31(桓환) 32(燮섭) 33(周주) 34(鎬호) 35(海해) 36(東동) 37(熹희) 38(均균)

 

(아계)

20(洪홍) 21(秉병) 22(烈열) 23(圭규) 24(鎬호) 25(洛락) 26(林임) 27(然연) 28(喆철) 29(鎔용) 30(準준) 31(種종)

 

稷山崔氏(직산최씨)

 

시조 최홍재는 고려 예종때 인물이며 시호는 양숙이다. 그는 여진정벌에 대훈을 세우고 우산 기상시로 서북면 병마사가 되어 포주를 수복 의주성을 쌓은 공으로 동지추밀원사, 형부상서, 판삼사사, 참지정사, 문하시랑 평장사 등을 역임한때 순천에 유배되었다가 복관 판이부사로 좌리공신에 책록되고 그후 수사공우복사 평장사에 이르렀으며 후손들이 직산에 토착하면서 본관을 직산이라 하였다.

 

珍山崔氏(진산최씨)

 

시조 최개의 자는 개지요 종한의 아들이다. 그는 1526년(중종21)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사예를 거쳐 부사를 지냈다.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하고 전주최씨에서 분적 본관을 직산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靑松崔氏(청송최씨)

 

시조 최세걸은 최온(해주최씨의 시조)의 원손으로 통훈대부로 어회장군에 추증되었다. 그는 삭주의 대다동에 이사하여 정착 세거하면서 본관을 전 거주지인 청송으로 하였다. 묘소는 평북삭주군 삭주면 대대동에 있다.

 

<행 렬 자>

31(基기 載재) 32(鋼강 銓전) 33(汝여 永영) 34(松송 杓표) 35(炅경 熒형)

 

淸州崔氏(청주최씨)

 

청주최씨는 경주최씨에서 분적한 계통이다. 시조 최치원의 15세손 단이 고려 예종때 문과에 급제 우정언, 좌사간 기거사인, 서해도 안찰사를 지냈고 인종대 권신 이자겸을 탄핵하다가 고성으로 유배되었다. 그후 복관되어 이부시랑에 이르고 서원(청주의 고호)군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그를 1세조로 하고 본관을 청주라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행 렬 자>

24(模모) 25(炳병) 26(均균) 27(鍾종) 28(泳영) 29(樂락) 30(烈열) 31(載재) 32(欽흠) 33(溶용) 34(柱주) 35(光광)

 

草溪崔氏(초계최씨)

 

초계최씨는 경주최씨에서 분적한 전주최씨의 분파다. 전주최씨의 시조 순작의 8세손 용궁(시호 문숙)이 고려 충렬왕때 충익재보조공신판사참찬 삼중대광광록대부세자태부로 팔계(초계의 고호)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1세조로 하고 본관을 초계라 하여 계승하고 있다.

 

<행 렬 자>

27(在재) 28(休휴 植식) 29(炳병 炯형) 30(基기 均균 圭규) 31(鏞용 鉉현 鍾종) 32(洪홍 浩호) 33(東동 桓환) 34(烈열 燁엽) 35(喆철 堯요)

 

忠州崔氏(충주최씨)

 

시조 최승은 본래 당나라 장군으로 846년(신라 문성왕8) 신라에 기근이 들어 군도가 창궐하자 당나라 무종의 명으로 병마사가 되어 이를 토평하였고 889년(진성여왕3) 신라에서 원종 애노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동벌 이를 평정하여 온청광록대부에 올랐고 그후 충주에 머물러 세거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본관을 충주로 하였다.

 

<행 렬 자>

23(愚우) 24(勉면) 25(會회) 26(溶용) 27(林임) 28(炫현) 29(坤곤) 30(鍾종) 31(雲운) 32(桂계) 33(勳훈) 34(址지)

 

耽津崔氏(탐진최씨)

 

탐진최씨는 경주최씨에서 분적한 해주최씨의 시조 최온의 증손 사전(시호 장경)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1126년(인종4) 권신 이자겸이 궁궐을 범하고 권세를 부리자 인종과 협의하여 이자겸의 심복 탁준경을 설득 그로 하여금 이자겸을 제거케 했다. 그 공으로 병부상서에 추중위사공신이 되고 이듬해 이부상서지도성사로서 수사공좌복사가 더해졌으며 삼한후벽상공신으로 참지정사판상서형부사를 거쳐 뒤에 수태위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고 탐진(강진의 고호)백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본관을 탐진으로 하였으나 누차의 병화로 인하여 제고증과 문헌이 실전되어 소목계통을 밝힐 수 없어 사전을 시조로 하고 그 후손중 응규, 준랑, 효노, 윤덕, 총, 흥건 그리고 유각, 민상, 한흥, 해, 제노, 심충 계, 승태, 장보 등을 중조로 기1세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시조 사전은 1147년(의종1) 제겹공신으로 인종묘정에 배향 묘소는 전남 강진군 군동면 나천리에 있고 향사일은 10월 15일이다.

 

<행 렬 자>

(강진금천파)

22(相상) 23(煥환) 24(基기) 25(錫석) 26(永영) 27(述술) 28(容용) 29(均균) 30(兌태) 31(洙수) 32(秉병) 33(杰걸) 34(在재) 35(鎭진) 36(淳순) 37(植식) 38(炯형) 39(坪평)

 

(청양예산판서공파)

22(煥환) 23(在재) 24(鉀갑) 25(鳳봉) 26(炳병) 27(寧녕) 28(茂무) 29(起기) 30(康강) 31(新신) 32(任임)

 

(준양파)

21(相상 柄병 榮영) 22(煥환 均균) 23(基기 在재 錦금) 24(錫석 鉀갑 洙수) 25(永영 鳳봉 秉병) 26(述술 炳병 炫현) 27(寧녕 基기) 28(茂무 鍾종) 29(起기 潤윤) 30(康강) 31(新신) 32(任임)

 

(효노파)

16(相상) 17(榮영) 18(奎규) 19(錫석) 20(洙수) 21(秉병) 22(在재) 23(鉉현) 24(潤윤)

 

(총파)

21(胃위) 22(旭욱) 23(丙병) 24(寧녕) 25(成성) 26(起기) 27(庸용) 28(宰재) 29(瑞서) 30(春춘) 31(洛락) 32(植식) 33(炯형) 34(均균) 35(鍾종) 36(浩호) 37(根근) 38(烈열) 39(堯요) 40(鎬호)

 

(윤덕파)

16(秉병) 17(燮섭) 18(時시) 19(鎭진) 20(洛락) 21(植식) 22(日일) 23(墩돈) 24(鎔용) 25(海해) 26(槿근) 27(烈열)

 

(광주주서파)

16(秉병) 17(鍾종) 18(衍연) 19(林임) 20(昰하) 21(岡강) 22(義의) 23(泰태) 24(東동) 25(明명) 26(重중) 27(鍊련)

 

(광주주남급서남파)

16(錫석 鎭진 銅) 17(泳영 漢한 淳순) 18(柱주 根근 植식) 19(熙희) 20(喆철) 21(鏞용) 22(澈철) 23(春춘) 24(夏하) 25(奎규) 26(鎬호) 27(河하)

 

(광주주북파)

16(相상) 17(燮섭 焌준) 18(時시 奎규) 19(鎭진 鍾종) 20(洛락) 21(植식) 22(日일) 23(墩돈) 24(鎔용) 25(海해) 26(槿근) 27(烈열)

 

泰仁崔氏(태인최씨)

 

태인최씨는 경주최씨에서 분적하였다. 시조는 고려 충혜왕때 척불숭유로 인하여 태산(태인의 고호)으로 낙향한 대사성 최해의 6세손 최용전이다. 그는 연산군때 갑자사화로 관직(예빈사판사)를 버리고 환향했다가 1530년(중종25) 안릉(재령의 별호)에 정착세거하면서 본향인 태인을 보관으로 하였다.

 

<행 렬 자>

13(珪규) 14(仁인) 15(孫손) 16(曾증) 17(永영)

 

通川崔氏(통천최씨)

 

시조 최경헌은 고려조에 정의대부동판밀직사사중서좌상시 감찰어사를 역임했고 그의 8세손 최운해는 고려말에 밀직부사를 지냈고 조선조에 삭주병마사로서 통천에 출전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병조판서에 승진했다. 그리하여 이 공훈을 영원히 남기기 위하여 경주최씨로부터 분적 통천을 본관으로 하였다.

 

<행 렬 자>

19(性성) 20(鎭진) 21(根근) 22(炳병) 23(圭규)

 

漢南崔氏(한남최씨)

 

시조는 고려조에서 합문지후를 지낸 최홍연이다. 후손 계방은 수사공, 상서우복사, 참지정사판삼사사를 지냈고 그의 아들 함(시호 문간)은 예종때 문과에 급제하여 1125년(인종3) 우정언지제고가 되고 다음해 이자겸의 난이 일어나자 국새를 가지고 왕의 행제소에 가서 시종 뒤에 예부시랑, 한림시독학사로 만수절사가 되어 금나라에 다녀왔고 병부상서 판삼사사를 거쳐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호형부사를 지냈으며 문장에도 능했다. 그러나 한남최씨의 본관의 유래와 후손들의 분포상황 등에 대해서는 상고 할 길이 없다. 한남은 수원의 별호이다.

 

海州崔氏(해주최씨)

 

시조 최온은 해동공자로 널리 알려진 최충의 아버지로 일찍이 해주목민관으로서 인정을 베풀어 이름을 떨쳤으며 문명도 높았고 뒤에 판이부사를 지냈다. 이 모두 해주에서 이루어졌고 또 누대 해주에서 세거하였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해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행 렬 자>

(사평공파)

28(文문) 29(兢긍) 30(善선) 31(雨우) 32(相상) 33(薰훈) 34(圭규) 35(鎭진) 36(泳영) 37(桓환) 38(丙병)

 

(좌랑공파)

28(煥환) 29(載재) 30(鉉현) 31(承승) 32(植식) 33(光광) 34(壽수) 35(鎭진) 36(求구) 37(種종) 38(容용)

 

(전한공파)

28(玉옥) 29(錫석) 30(溥부) 31(秉병) 32(燮섭) 33(老노) 34(鎬호) 35(一일)

 

和順崔氏(화순최씨)

 

시조 최세기는 고려조에 평장사를 지냈고 오산(화순의 별호)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화순으로 하였다. 묘소는 화순읍 일심리 마을에 있는데 묘소의 서방 5리 지점에 최씨우물과 팔판동의 한림정은 최씨가 세거했다는 유지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후 세계가 실전되어 그 후손 최언을 기1세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이밖에 최윤의를 1세조로 하는 계통도 있다.

 

<행 렬 자>

23(在재) 24(鉉현) 25(源원) 26(植식) 27(憲헌) 28(喜희) 29(鍾종) 30(澤택)

 

黃州崔氏(황주최씨)

 

시조 최남혁의 상계는 전주최씨에서 분적한 계통인데 문헌이 없으므로 분파계대를 상고 할 길이 없다. 그는 조선 개국 초기에 벼슬이 좌상 이었으나 직간하다가 황주목사로 좌천되고 그 후 평북 의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정착하였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전임지를 추모하며 본관을 황주라 하였다. 묘소는 의주군 송장면 금광동에 있다.

 

<행 렬 자>

17(重중) 18(碩석 膺응) 19(廷정 元원) 20(載재 基기) 21(鳳봉 鉉현) 22(鍾종 俊준) 23(泰태)

 

興海崔氏(흥해최씨)

 

흥해최씨는 경주최씨와 동원 분파이다. 시조 최호는 최치원의 7세손 균의 11세손으로 그는 고려때 삼중대광문하시중 삼한벽상 공신 신호위상장군으로 곡강(흥해의 별호) 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경주최씨에서 분적 그를 1세조로 하고 본관을 흥해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묘소는 경북 영일군 의창읍 송남동 간좌에 있다.

 

<행 렬 자>

25(慶경 潼동 興흥 翼익 道도 基기 鉉현 昌창 世세 龍용) 26(致치 熙희 道도 泳영 根근 軾식 祐우 植식 泰태) 27(俊준 基기 幹간 南남 百백 毅의 奎규 祐우 增증) 28(翰한 漢한 炳병 尙상 昺병 廷정 壽수 宅택) 29(圭규 鶴학 坤곤 斗두 鎭진 衡형 道도 錫석 植식) 30(舜순 煥환 鎬호 鳳봉 達달 茂무 鶴학 漢한) 31(椿춘 在재 達달 植식 弘홍 權권) 32(鍾종 容용 相상 潤윤 熙희 燦찬) 33(根근 烈열 洙수 奎규 在재) 34(官관 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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