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씨(秦氏)


진씨는 문헌에 47본으로 나타나 있다. 진씨는 공자의 제자로서 문묘에 배향된 상을 시조로 진욱이 고려조에 박사로서 진주군에 봉해짐으로써 본관을 진주로한 진주진씨와 신라의 원병으로 백제평정에 참가했다가 귀화한 필명을 시조로 하는 풍기진씨를 제외한 45본에 대하여는 미고이다.

 

晋州秦氏(진주진씨)

 

진씨는 전체의 후예이다. 백익이 순제로부터 영씨를 사성받았고 그의 후손 비자가 진이라는 고을에 봉해졌으므로 이로써 성을 삼으니 이에 진성의 시조가 되었으며 시조 진상은 공자의 제자로서 우리나라 문묘에 배향되었다. 진상의 76세손인 욱이 고려조에 박사보리공신 이었으며 진주군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진주로 본관을 삼았다. 욱의 제2자인 계백은 고려 공민왕조에 찬성사로서 홍윤, 최만성 등과 정사를 의존하다가 마침내 그들이 모반할 것을 알고 제주로 피거함으로써 진주진씨의 입향조가 되었다. 계백의 손 계순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장은 인규(판포파조) 중은 인한(명월파조)계는 의한(납읍파조)이 있다. 그후 판포파와 납읍파는 본관을 풍기로 개관하고 있다. 그러나 명월파의 한 사람인 문종은 1637년에 출생하여 1719년 사망한 흥준의 묘비에 진주진씨라 한 고증이 발견되었고 또한 전고문헌권지구에 진계백은 진주진씨임이 분명하므로 양파가 복관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豊基秦氏(풍기진씨)

 

당나라 태종때 복사를 지낸 진숙보의 가계에 따르면 황제의 후손 고신씨의 제4자 계중의 증손 靡는 하나라때 사람인데 그 靡의 16세손 희자가 주나라 선왕을 섬기면서 많은 공을 세워 옹주에 봉해지고 진씨로 사성받았다고 한다. 한편 송나라때 용도각학사를 지낸 진관의 가계 서문에 의하면 진씨는 원래 황제의 후손으로서 고신씨의 제4자 계중은 요순때의 군자팔원의 한 사람으로 그의 아들 윤후는 하나라때 사도가 되었다고 한다. 윤후의 후손 겸은 옹주에 살면서 서하백이 되었으며 겸의 후손 상은 풍익후 단은 신식후 조는 공자의 제자로서 화정후가 되었다. 또 조의 후손 진숙보는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홍은 회해후 창은 청주후 욱은 채주후에 봉해졌다. 창의 후손인 진필명은 원래 당나라 태원사람으로 당나라 고종때 대사마대장군으로서 신라를 도우러 나와 백제평정에 참가하였다가 그대로 이 땅에 머물러 살게 되었다. 풍기진씨는 그를 시조로 하고 풍기를 본관으로 하여 계대하고 있으며 그밖의 진씨는 풍기진씨의 분파라는 것이 통설로 되어있다. 묘소는 안릉 태조산하에 있고 향사일은 음10월1일이다.

 

<행 렬 자>

24(基기) 25(鎭진) 26(洪홍) 27(東동) 28(容용) 29(在재) 30(鉉현) 31(準준) 32(柱주) 33(炯형) 34(敎교) 35(欽흠) 36(雨우) 37(根근) 38(榮영) 39(均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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